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고 속임수와 계략이 엇갈려 보는 내내 집중해야 했다.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지만 사실 재미있었다. 곳곳에 유머코드가 숨겨져 있는 블랙코미디이면서 결말을 예측할 수 없는 스릴러이기도 했다. 70년대초 초등학교 시절, 회충, 촌충, 십이지장충이 등장하는 기생충박멸협회의 홍보영화와 의무적으로 제출해야 했던 채변 봉투의 기억이 강제로 불려나오고 영화를 관통하는 ‘지하실’ 냄새는 80년대 초반 살았던 반지하방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스포일러 주의
반지하에 사는 기택(송강호 분)의 가족은 전원 백수다. 소득이라고는 동네 피자가게의 박스를 접어주고 받는 일당이 전부다. 어느 날 기택의 아들 기우(최우식 분)의 명문대생 친구인 민혁이 찾아와 자신이 하고 있던 부잣집 박 사장(이선균 분)의 딸, 다혜의 고액영어과외 자리를 넘겨준다. 수능을 4번이나 봤지만 대학에 들어가지 못한 기우는 민혁이 소개해 준 고액과외 강사를 하기 위해 대학 재학증명서를 위조한다.
다송의 생일을 맞아 박 사장 가족이 집을 비운 사이 잠시나마 달콤한 최상위 계층의 삶을 즐기던 기택의 가족은 문광의 갑작스런 방문으로 그 집 지하벙커에 문광의 남편인 근세(박명훈 분)가 무려 4년 3개월 17일 동안이나 숨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문광은 근세가 계속 머무를 수 있게 돌봐달라고 부탁하지만 충숙은 매몰차게 거절한다. 설상가상으로 캠핑을 떠났던 박 사장의 가족마저 폭우 때문에 계획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오게 되면서 문광과 근세 부부도 기택 가족의 정체를 알게 된다.
◇하나의 숙주, 두 종류의 기생충
‘기생충’은 빈부격차와 계층갈등 같은 자본주의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지상’, ‘반지하’와 ‘지하’, ‘계단’, ‘비’와 같은 수직적인 이미지와 공간의 대비를 통해 명확하게 드러낸다. 등장인물들은 거주하는 공간에 따라 세 계층으로 나누어진다. 호화저택에 거주하는 부유층, 반지하에 거주하는 빈곤층, 그리고 그보다 더 못한 지하에 거주하는 극빈층이다. 반지하에 사는 빈곤층은 부유층에 기생하면서도 최하위 극빈층에 대해서는 지배계층 행세를 하며 극빈층을 멸시하고 군림하려든다. 하위 두 계층은 서로 협력해서 부유층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부유층 숙주에 기생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운다.
'기생충'은 다양한 은유적 코드를 담고 있기에 바라보는 시각 또한 여러 갈래다. 자본주의가 조장한 빈부격차와 계층갈등이라는 보편적인 문제를 한국적인 문법과 유머감각으로 재미있게 풀어냈다는 호평이 대세이지만 섬뜩한 적의(敵意)와 핏빛 적개심으로 가득한 좌파 선동영화라는 해석도 있다.
◇부자는 선하고 가난한 자는 악하다?
그런데 ‘기생충’은 ‘부자는 악하고 가난한 자는 선하다’ 라든가 ‘지배계급의 착취에 맞선 피지배계급의 봉기’, ‘피지배계급에 속한 이들의 단결과 저항’ 같은 좌파영화의 기본 문법을 따르지 않고 있다. ‘기생충’에 나오는 박 사장 가족은 허영과 허위의식은 있어도 자신들이 고용한 이들을 착취하지 않는다. 오히려 호의와 순수함으로 기택네 가족을 받아들인다. 반면 기택네 식구들은 사기와 계략, 배신으로 박 사장의 운전기사와 가사도우미를 내쫓고 그 자리를 차지한다. 이 과정에서 누군가 억울하게 피해를 입거나 희생되더라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대학 재학증명서를 위조하면서도 기우는 “저는 이게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내년에 이 대학에 꼭 갈 거거든요”라고 말한다. 기택은 그런 아들을 책망하기는커녕,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고 칭찬한다.
로이터 통신은 최근 ‘기생충’의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수상을 보도하면서 ‘조국 사태’를 언급했다. 로이터는 10일(현지시간) ‘한국의 뿌리 깊은 사회적 분열을 반영한 영화 기생충’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영화에서 한 인물이 학위를 위조하는 장면은 최근 한국에서 발생한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스캔들’을 연상시킨다”며 “그는 가족 투자와 자녀의 대학 입시와 관련된 문서를 위조해 지난해 12월 기소당했지만, 범죄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고 전했다.
로이터는 “조국 스캔들은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부패 척결을 강조하며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과 여당을 지지한 청년들에게 특히 실망을 안겨줬다”며 “영화 기생충의 성취는 훌륭하지만, 아들의 위조 기술과 구직 계획에 감탄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건 씁쓸했다”던 한 관람객 평가도 함께 전했다. 안철수 국민당 창당준비위원장도 “우리 사회의 기생충은 반지하 거주자가 아니라 공정하지 않은 방법으로 남의 것을 빼앗는 사람들”이라는 글을 남겨, 사실상 조국 전 장관을 겨냥했다.
◇갑을(甲乙) 갈등에서 을병(乙丙) 갈등으로
이 영화에서 피지배계층(기생충)의 적(敵)은 숙주인 박 사장네 가족이 아니라 또 다른 기생충이다. 기택 가족과 그들에 의해 쫓겨난 가사도우미 문광 부부는 서로 협력하거나 연대하여 박 사장네 가족과 맞서는 대신, 하나의 숙주를 온전하게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그 과정에서 문광은 계단에서 굴러 죽음을 맞는다. 계층간 갈등뿐만 아니라 점차 심각해져 가는 계층 내 갈등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기생충’은 여느 ‘좌파’영화들과는 결을 달리한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 계속되고 있는 편가르기 정책은 진영 간의 대립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갑(甲)과 을(乙) 간의 갈등을 넘어 을(乙)과 병(丙) 간의 갈등과 대립을 부추겼다. 식당 운영자와 종업원, 편의점 사장과 알바생,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조원과 비노조원, 교수와 시간강사, 성평등을 둘러싼 남녀간의 갈등까지 사회 곳곳에서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을병(乙丙) 간의 갈등은 영화 속 문광부부와 기택가족 간의 갈등과 혈투로 그려진다. 이 영화는 계층갈등을 다루고 있지만 방점은 ‘계층 간 갈등’보다는 ‘계층 내 갈등’에 찍혀 있다.
◇2020년 대한민국의 자화상 ‘기생충’
지난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에 이어 아카데미상에서의 놀라운 쾌거로 현재 ‘기생충’은 전 세계 67개국에서 개봉된 상태이며 핀란드·불가리아·인도 등의 국가에서도 개봉을 앞두고 있다. 지난해 10월 미국 내 3곳에서 개봉한 영화는 현재 1000여곳까지 상영관이 확대됐다. ‘기생충’의 흥행 돌풍은 전 지구적 현상으로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기생충’이 2020년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라는 생각이 필자의 머릿속을 맴도는 것처럼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고 있는 세계 각국 국민들이 저마다의 버전으로 ‘기생충’을 관람하며 자국의 ‘초상화’라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논설고문·건국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