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례식을 올린 류영모는 그 길로 호남선 목포행 열차를 타고 목포에 있는 처가로 향하였다. 신부의 부모님을 뵙기 전에는 감히 신방에 들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상황을 전혀 모르는 신부는 신랑이 신방에 들기를 기다렸다. 밤이 늦도록 신랑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신부가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다만 신랑이 행방불명이 된 셈 치고는 집안이 너무 잠잠한 것을 위안으로 삼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장가든 날 신부보다 더 중요한지 궁금하였다. 신식 혼례를 올렸으니 신랑이 풀어 주어야 하는 족두리가 없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옛말에 집안이 쓸쓸하면 맏딸 시집보낸 집 같다고 한다. 22살이 되도록 고이고이 기른 딸을 멀리 서울로 시집보내고 부모는 쓸쓸한 마음과 온갖 걱정을 보태면서 집안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누구인가. 새신랑인 사위 류영모가 목포 처갓집 대문 안으로 쑥 들어온 것이다.
두 사람은 기겁하듯 놀랐다. 아니, 자네가 어떻게 여길? 마땅히 서울에서 신부와 함께 있어야 할 신랑이 홍길동처럼 목포에 나타났으니 예삿일은 아니다. 사위 류영모는 집 안으로 들어서서 장인·장모에게 인사를 올렸다. 어찌 신부를 혼자 두고 이곳에 왔는가. 이렇게 묻자 류영모는 이렇게 말한다. 장인·장모님에게 인사를 올리기 전에 어찌 신방에 들 수 있겠습니까. 이걸 나무라야 하나, 고마워해야 하나. 장인·장모는 난감한 표정 속에서도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그리고 신랑의 손을 덥석 잡았다. 우리를 그렇게 깊이 생각해 주다니 고맙구려.
장인·장모 부부는 서울에서 신부를 두고 내려온 류영모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당시는 1915년이라는 걸 생각하면, 요즘의 잣대로 해석하는 일은 어리석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신부의 당혹감은 물론이고, 딸을 서울로 보낸 목포의 부부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사위를 대하는 일을 어려워하던 시절인지라, 엉뚱해 보이는 출현에도 깍듯하게 대하려 애썼을 것이다. 장모는 백년손님으로 여겨지던 사위를 위해 부랴부랴 음식을 준비했을 것이고, 그 시간에 장인은 별로 탐탁지 않아하던 키 작은 사위를 앞에 두고 대화를 나눴을 것이다.
사위가 배움이 높다고 하니 이것저것 물었다. "나라가 외세의 병탄에 들어갔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 되었는데 장차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일본에서 공부를 하였다고 하니, 그곳에선 조선을 어떻게 보는가? 거기에서 만난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어떻게 대하던가?", "서양이 물밀듯 밀려 들어오니 동양의 형세는 장차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서양이 장차 더욱 동양을 노려 침탈을 할 가능성이 있는가?", "기독교나 천주교라는 서양 종교가 들어오고, 이 땅에도 유교나 노장·불교 같은 믿음들이 있는데 어느 것이 인생을 반듯하게 하고 삶과 죽음 속에서 진리를 깨닫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인가?"
장인 김현성은 군수를 지낸 인물인지라 스스로도 시골에선 박학다식으로 여러 물음을 듣는 입장이기에, 그가 내심으로 실상을 궁금해하던 질문들을 쏟아냈을 것이다. 하나하나 쉽지 않은 의문인데도, 25세의 류영모는 나직한 목소리로 당시의 최신 시사상식을 막힘 없이 술술 풀어놓는다. 그저, 마주 앉은 시간을 보내려고 던진 질문이었는데, 돌아온 대답을 들으면서 장인은 스스로의 자세를 고칠 만큼 놀라고 있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이, 내가 지금껏 주위에서 보던 보통의 사내가 아니구나."
대화는 오래 이어졌고, 사위의 식견 속에서 세상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지니게 되는 듯한 느낌을 받은 장인은 문득 이런 말을 꺼낸다. "여보게, 자네 얘기들이 실상을 꿰뚫고 있고 나라의 뒷날까지 깊이 걱정하고 있는 대장부의 기개까지 느껴지게 하네. 우리 둘째 딸 숙정이가 있네. 자네 부인이 된 첫째와는 세 살 터울일세. 맏사위가 둘째의 인연도 한번 찾아주심이 어떻겠는가?"
욕망의 경솔을 제어하기 위한 청년의 선택
그러면서 경탄을 이어갔다. "5척 단구(短軀)에서 어떻게 그런 기개와 담론이 나오는지 궁금하기까지 하네." 키가 작다는 건, 장인이 처음에 그를 마뜩잖아했던 이유가 아닌가. 류영모는 이렇게 말을 한다. "5척의 키나 8척의 키는 큰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우주에 비하면 얼마나 작겠습니까. 신체의 자잘한 것에 얽매여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우주를 살피지 못한다면, 그 눈이 어찌 높고 큰 것이겠습니까. 학교에 있을 때 천문학과 물리학을 배우고 가르쳐, 세상을 이루는 보다 큰 것에 대해 관심을 지니게 되니 소소한 차이들에서 마음을 쓰는 일들이 부질없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니 단구와 생각의 크기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이 말에 호쾌한 무골인 장인의 입이 하릴없이 닫히고 말았다. 류영모는 처가의 큰 대접을 받고 귀경하는 길에 관촉사에 들러 은진미륵보살입상을 구경했다. 논산의 대장간에 들러 솥을 만드는 장면을 보기도 했다. 신부를 두고온 신랑으로선 속 터질 만큼 느긋한 행보였다. 서울의 김효정과 재회한 것은 첫날밤이 일주일이나 지난 뒤였다. 대체 왜 이토록 사랑의 입방(入房)을 늦췄을까. 그가 직접 이에 대해 말한 바는 없지만, 젊은 나이로 조급해지는 마음을 바로잡고 사랑의 이름을 빌린 욕망의 경솔을 제어하고자 함이었을지 모른다.
류영모는 결혼 2년 뒤인 1917년에 첫아들 의상(宜相)을 낳았다. 1919년엔 둘째 자상(自相)을, 1921년엔 셋째 각상(覺相)을 두었다. 아들 셋의 이름에 항렬 자 상(相)을 빼면 의자각(宜自覺)이 된다. 마땅히 스스로 깨달으라. 그는 별 뜻 없이 이름을 지었다고 말했지만, 과연 그랬을까. 그가 아들들이 어떻게 하기를 바랐는지 느껴지는 대목이다. 1926년에 낳은 딸의 이름은 월상(月相)이었다. 음력 보름에 낳았기 때문이었다. 자식들의 이름을 모두 이어보면 의자각월(宜自覺月)이 아닌가. '마땅히 스스로 깨닫아 달처럼 환해져라', 이렇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스스로 깨달아 달처럼 환해지는 일은 부모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핏줄에 대한 애착을 담은 말도 아니다. 태어난 이상, 스스로 그 정신의 길을 찾아서 가야 한다는 진정어린 애정의 충고이다.
마땅히 스스로 깨달아 달처럼 돋으라
류영모는 자식을 잘 길러 훌륭하게 만들겠다는 생각이 어리석다고 보았다. 자식은 결국 육신이 품는 희망일 뿐이다. 후손이 끊어질 것을 고민하던 나라가 결국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는다. 정신이 끊어지지 않아야 나라가 산다고 말한다. 정신을 이어주는 것이 육신을 이어주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이런 면모를 생각해보면, 아이들의 이름 속에 넣어놓은 '의자각월'은 '정신 잇기'의 염원이 아닐까 싶다. 육신으로는 내가 낳았지만 정신으로 거듭나는 것은 너희 스스로 하늘의 아버지에게로 나아가 해야 할 일이다. 그것이 마땅히 스스로 깨달아 돋아오르는 달이 아닌가.
류영모의 결혼생활은 담담하고 아름다웠다. 김효정과 회혼(回婚)을 넘기며 백년해로했다. 한편 류영모의 처가, 즉 김효정 친정집안의 뒷날을 훑어보면 이렇다.
류영모의 처남 김건표는 뒤에 서울에 와서 살았다. 만년에는 출판사에서 청탁하는 외국서적을 번역하는 일을 하였다. 출판사와 인연을 맺고 일을 하는 처남의 권고로 당시의 도량형에 관한 책을 편술하여 이름을 '메트르'라 하였다. 류영모는 처남을 돕겠다는 생각으로 그 일을 하였던 것인데, 나중엔 아예 개성사(開成社)라는 출판사를 열게 됐다. 개성(開成)이란 <역경(易經)>의 계사전에 나오는 개물성무(開物成務, 만물의 뜻을 열어 천하의 일을 성취함)를 뜻한다. '메트르'를 판매하기 시작했을 때 출판사를 경영하는 일본 사람이 자사 출판 서적을 표절하였다고 소송을 제기하여 왔다. 도량형의 원기(原器)를 실은 것을 트집 잡은 것이었다. 도량형의 원기는 인류 공동의 표준기기로 표절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당시는 일제강점기요, 일본 사람의 소송이라 패소한다. 개성사는 책도 내보지 못한 채 그만두었다.
처남 김건표는 자녀를 못 두었기에 처가의 손(孫)은 끊어졌다. 김건표의 아내(류영모의 처남댁)는 90살이 넘도록 장수하였다. 류영모가 사준 땅에 지은 전주 동광원에서 살다 돌아갔다. 처제 김숙정은 혼인하여 오류동에서 거주했다.
다석 어록 = 하늘아버지, 땅아버지
"눈을 감고 나 자신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상상을 해보면 머리는 물론 온몸이 시원해진다. 이 다섯 자 몸뚱이를 보면 한심하다. 이에서 박차고 나가야 한다. 우리의 머리가 위에 달린 게 위로 '솟나'자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진리되시는 하느님을 향해 머리를 드는 것이다. 머리는 생각한다.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이 하느님께 머리를 두는 것이다. 하느님이 내 머리다. 내가 예수를 스승으로 받든 것은 예수가 하느님과 부자유친하여 효도를 다하였기 때문이다. 하느님께 예수만큼 효도를 다한 사람이 없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부터가 남다르다.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가정에서 자녀들이 아버지를 부르듯이 그렇게 친근하게 부른 사람이 예수가 처음이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 것만으로도 예수는 인류에게 큰 공헌을 하였다. 예수처럼 하느님을 우러러 아버지라고 부를 때 몸속의 피가 용솟음치고 기쁨이 샘솟는다. 하느님 아버지를 내가 부른다. 아버지의 얼굴이 이승에는 없지만 부르는 내 마음속에 있다. 십자가 소리보다 아버지 소리를 많이 하라. 언제나 염천호부(念天呼父)하는 것이 믿음이다. 하느님 아버지는 화두이며 공안(公案, 석가의 말과 행동)이다. 일요일 어느 곳에 가서 어떤 의식에 참여하는 것만으로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면 잘못된 생각이다. 마음머리, 말머리에 하느님을 모시고 아버지를 불러야 한다. 이 땅에 아버지를 모시면서 나쁜 짓 하는 아들은 없다. 하느님 아버지를 모시는 효자에 악인은 없다. 유교가 잘못된 것은 하늘의 아버지를 버리고 땅의 아버지만 찾다가 땅의 아버지조차 버리게 된 것이다. 하늘의 아버지를 먼저 찾아야 땅의 아버지도 찾게 된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