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 (1) 베트남의 ‘도이머이’, 어떻게 시작됐나?

2020-02-02 18:10
  • 글자크기 설정

[하노이 홍강 강변에서 이한우 교수]



*아주경제는 베트남 개혁·개방을 연구하는 최고 전문가 서강대 이한우 교수의 칼럼을 연재한다. '이한우의 베트남 포커스'는 베트남의 개혁 과정을 톺아보고 분석하며 날로 확대되고 있는 한·베트남 관계에 대한 현황과 전망을 내놓을 것이다. 이한우 교수는 서강대에서 베트남 개혁정책을 주제로 정치학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서강대 동아연구소 및 동남아시아학 협동과정 교수로 있다. 베트남 국민경제대학 객원연구원으로도 있었다. 그는 베트남 정치경제 개혁과정을 주로 연구하고 있으며 개혁으로 인한 사회문화 변화에도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 <베트남 경제개혁의 정치경제>, <한국-베트남 관계 20년> 등 책과 베트남 개혁에 관한 연구 논문을 여러 편 냈다.

개혁 이전의 베트남은 어떤 상황이었나? 


베트남의 개혁정책을 ‘도이머이’(Doi Moi) 정책이라고 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도이’는 바꾼다, ‘머이’는 새롭다는 뜻이니, ‘도이머이’는 새롭게 바꿈, 즉 쇄신이라고 할 수 있다. 베트남이 1980년대 후반 개혁정책을 본격적으로 채택하며 이를 어떻게 부를 것인가를 두고 내부에서 논의가 있었다. 유신, 혁신 등 용어도 제시됐지만, 전 국민이 쉽게 이해하게 순 베트남어 ‘도이머이’로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베트남은 ‘도이머이’ 정책을 어떻게 채택하게 됐을까? 베트남의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내다보기 위해 그간의 진행과정을 살펴보자.

1975년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흡수 통일하자, 베트남은 남부를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하고 경제발전을 추진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된다. 베트남은 1976년부터 1980년까지 5개년간 사회총생산량을 연평균 13~14% 증가시킬 것을 목표로 세웠다. 결과는 어땠을까? 한마디로 처참했다. 성장률이 연평균 0.4% 증가에 그쳤다. 물가상승을 고려한다면 마이너스 성장이라고 해야 한다. 사회주의 사회의 사회총생산은 자본주의 사회의 GDP(국내총생산)에서 서비스 부문을 뺀 것과 유사한데, 베트남은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전반기에 거의 성장하지 못했다. 베트남의 극심한 경제적 침체효과는 사회에서 여러 모습으로 나타났다. 당시 설탕 부족으로 아이스크림을 제대로 못 만들고 쌀이 없어 쌀국수를 충분히 만들지 못한다고 시사주간지에 보도되곤 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장기간 전쟁의 유산 때문이다. 베트남은 프랑스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다가 1945년 8월 일본의 항복으로 독립의 기회를 맞았다. 호찌민을 지도자로 하는 베트민(월맹) 세력이 주도하여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하지만 프랑스가 다시 식민 지배하려고 베트남으로 복귀했고, 베트남은 이에 대항해 1946년 말부터 1954년 5월까지 프랑스와 전쟁을 치렀다. 이를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이라고 한다. 그 사이 프랑스는 베트남의 마지막 왕 바오다이를 내세워 1949년 베트남국을 설립해 놓았다. 1954년 7월 베트남이 제네바협정에 서명하며 남북 분단안을 받아들였는데, 여기에는 2년 내 남북 총선거를 하도록 규정돼 있었다. 이 총선거를 남베트남이 거부하면서 남북은 대치했고, 1964년부터 남북 간 본격적 전쟁으로 이어졌다. 미국, 한국, 중국, 소련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이 이념적 지형에 따라 남북 베트남을 각기 지원했다. 이것을 제2차 인도차이나전쟁, 간단히 베트남전쟁이라고 한다. 베트남전쟁이 1975년 4월말에 끝났으니, 베트남은 30년간 전쟁상태에 있었다. 그 폐해가 적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둘째, 통일 이전 북베트남이 사회주의 체제에서 중공업 중심의 경제발전전략을 채택한 것도 한 원인이다. 이것은 급속한 사회주의 사회 건설과 전쟁 수행을 위한 공업화 전략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개발도상국인 베트남이 중공업 중심 발전전략을 채택한 것은 많은 자본을 투여해야 하는 반면 유휴 노동력을 많이 흡수할 수 없는 등 발전단계에 맞지 않는 전략이었다. 이 때문에 경공업 생산이 적어 생활필수품이 부족했기에, 결핍 경제 상황에 처하게 됐다. 주민들은 부족한 물건을 배급받듯이 국영상점에서 구입했기에, ‘사회주의’의 베트남어 머리글자 XHCN을 ‘매일 줄서는 체제’라고 바꿔 말하며 비꼬고 있었다.

셋째, 베트남이 남부를 통일한 후 자본주의 체제를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불협화음이 생기게 된 이유도 들 수 있다. 경제체제를 사회주의로 전환하는 것은 공업과 상업을 국유화하고, 농민들을 집단농장에 가입시켜 그 재산을 집단적으로 소유하는 것이다. 이로써 자본주의 사유재산제로부터 사회주의 공유재산제로 전환한다. 베트남 정부가 공업과 상업부문의 중대형 기업들을 강제로 국유화하였으나, 중소규모 상업의 과반수는 여전히 개별 상인들에 의해 영위되고 있었다. 농촌에서는 농민들이 ‘합작사’라는 집단농장에 형식적으로만 가입하고 실제로는 기존의 개별 영농을 유지하고자 했다. 베트남이 1978년부터 농업집단화를 추진하다가 1986년에 중지하게 되는데, 1986년 기준으로 집단농장 가입률은 남부 전체에서 30%, 곡창지대인 메콩델타에서 6%에 불과했다. 또한 농민들은 자기 소비량 이상으로 쌀을 많이 생산하지 않으며 정부 수매에 저항하고 있었다. 이로써 베트남은 메콩델타라는 곡창지대를 갖고 1년에 3모작을 할 수 있는 자연환경 하에 있으면서도 1988년까지 쌀을 수입해야 했다.

넷째, 베트남이 1978년 12월 캄보디아를 침공하면서 세계적 금수조치가 내려지게 된다. 이로 인해 경제적으로 고립된 베트남은 경제적 침체를 겪게 된다. 더욱이 베트남전쟁 기간에 지원을 아끼지 않던 중국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베트남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소련, 동유럽 국가들과 주로 경제협력관계를 가졌다. 이 때문에 지금도 베트남 고위 지도자들 가운데 소련 유학파가 많다. 베트남은 세계은행(World Bank)이나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금융기구들로부터 차관을 들여올 수 없는 곤란을 겪었는데, 이 금수조치는 1994년에 가서야 풀리게 된다.

위로부터인가 아래로부터인가, 도이머이의 본질은?


이런 상황으로 인해 1970년대 후반, 1980년대 전반 베트남 경제상황은 매우 어려운 지경이었다. 도시에서는 쌀이 부족하여 매월 배급하는 1인당 13㎏의 양곡 가운데 쌀의 비중을 줄였다. 도시 주민들은 자기 고향에 가서 쌀을 가져오는 자구책을 마련해야 했는데, 이를 ‘고향쌀’이라고 했다. 어떤 주민들은 아파트 화장실에 돼지나 오리를 키워 부족한 육류를 보충했다. 그들은 오리를 아침에 밖으로 내보내 모이를 먹고 집으로 돌아오게 훈련시켰다. 이렇게 도시가 농촌처럼 된 현상을 “도시의 농촌화”라고 비유하곤 했다.
 

[1993년 호찌민시 거리, 이한우 교수 촬영] 



한편으로 북부 농촌에서는 탈법적 계약제가 확산되고 있었다. 중앙정부 몰래 지방 관료와 농민들이 결탁하여 토지를 단기간 분배하고 경작하여 계약량 이상 생산한 것을 농민들이 가질 수 있게 한 것이다. 이것을 생산물계약제라고 한다. 처음에 이 제도가 불법적으로 시행되다가, 농업생산 증가의 성과를 내자 공산당이 1981년 이를 공인하게 된다. 또한 농민들은 경작지의 5%만큼 텃밭을 보유할 수 있었는데 이를 ‘5% 땅’이라고 불렀다. 어떤 지역에서는 농민들이 땅을 10%까지 불법적으로 잠식하는 경우도 있었다. 농민들은 여기에 집중해 많은 생산량을 냈지만 집단농장에는 소홀했다. 농민들 실제 수입을 조사해봤더니 2/3를 사회주의 공식경제부문 밖에서 얻고 있었다. 이를 두고 “바깥 다리가 안 다리보다 길다”고 했다. 이처럼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안으로부터 침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경제적 침체와 동시에 사회주의 체제 자체가 약화되고 있었기에, 1979년 9월 공산당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개혁의 요구가 제기됐다. 공산당과 정부는 1980년대 초 부분적 경제개혁을 시작했고, 1986년 12월 제6차 공산당대회에서 ‘도이머이’를 선포한 이후 전면적 개혁을 수행하게 됐다.

여기에서 “개혁이 어디서부터 시작됐는가, 아래로부터인가 위로부터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아래로부터 개혁이 시작됐다는 것은 개혁이 국민들의 저항으로부터 시작됐다는 뜻이고, 위로부터 시작됐다는 것은 공산당이나 정부가 개혁정책 프로그램을 부과했다는 뜻이다. 베트남은 공식적으로 국민들의 요구와 공산당 및 정부의 지도가 조화롭게 합쳐져서 개혁정책을 채택했다고 한다. 1970년대 말 농민들의 사회주의 농업체제에 대한 저항에 주목하면 아래로부터의 개혁이라고 할 수 있으나, 1986년 12월 베트남공산당이 전면적 개혁정책을 채택한 것에 주목하면 위로부터의 개혁이라고 해야 한다. 어느 곳에 방점을 두느냐에 따라 개혁의 개시 시점과 주도세력에 차이가 나는 것이다.

 

[2017 호찌민시 거리, 이한우 교수 촬영]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공유하기
닫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