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13)신앙의 씨알 심은 100년전 선지자

2020-01-13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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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시대를 만든 건 석기시대의 돌이었소

1915년의 오산학교 풍경. [자료=독립기념관 제공]



20세기 한국 문명을 깨운 '오산학교'

평안북도 정주는 영변의 아래쪽에 있는 곳으로, 역사적으로는 고려 강감찬 장군이 거란을 물리친 귀주대첩으로 유명하다. 귀주(龜州)는 정주의 옛 이름이다. 조선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로 피란 갈 때 사흘간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이후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던 곳도 이 일대였는데, 관군이 난을 진압한 뒤 정주는 반역향(叛逆鄕)으로 찍혀 정원현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은 조선 500년간 과거 급제자를 280여명이나 배출하여 한양을 제외하고는 합격자를 가장 많이 낸 학향(學鄕)으로 손꼽혔다.

1905년 경의선이 개통되면서 정주역이 생겼고 교통의 요지로 발달한다. 오산학교가 설립되던 1907년 정주군의 인구는 4만2000여명으로 북적이는 도시였다. 이곳은 근대에도 수많은 인물을 배출하여 '20세기 초기 근대화를 이끈 요람'으로 손꼽힌다. 문학가 백석과 이광수, 언론인 방우영, 종교인 문선명의 고향이다.

이승훈이 세운 오산학교(정주군 갈산리 오산)에는 여준·윤기섭·류영모·장지영·이광수·염상섭·김억이 교사를 지냈고, 교장으로는 백이행·이종성·박기선·조만식·류영모·주기용 등 뛰어난 교육자들이 학교를 키워냈다(류영모는 교사와 교장을 모두 지낸 오산학교의 핵심 교육자였다). 백인제·김홍일·함석헌·이중섭·김소월이 이 학교 출신 학생이며, 김기석·주기철·한경직 목사도 오산학교를 나왔다.

학생 7명에 교사 2명으로 부랴부랴 창설했던 이 작은 학교(4년제 중등과정)가 일제 치하 식민지의 독립운동과 주체적 종교운동의 산실이 되는 과정은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이다.

평북 구성에서 태어난 김소월은 오산학교 재학시절 교사 김억의 영향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22년 '개벽'지에 실린 '진달래꽃'은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이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이란 표현으로 등장하는 이 일대(영변 약산 제일봉과 학벼루)의 아름다운 풍광은 황폐한 식민지 민족의 가슴에 잊을 수 없는 향수를 아로새겼다.

5~6년의 짧은 기간 동안 154편의 시를 남긴 천재 김소월, 그리고 '여우난 곬족' 등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시들로 또 다른 국민시인으로 인정받는 백석을 낳은 것만으로도 오산학교는 '위대한 시의 메카'로 불릴 만하다.

김소월이 그리워한 교장선생 조만식

1939년 5월 1일자 조선일보에는 백석이 기고한 '오산학교의 추억'에 관한 글이 실렸다. '소월(素月)과 조선생(曺先生)'이란 제목의 칼럼이다. 그대로 인용해본다.

<나는 며칠 전 안서 선생님한테로 소월이 생전 손으로 놓지 않던 '노트' 한 권을 빌려 왔다. 장장이(페이지마다) 소월의 시와 사람이 살고 있어서 나는 이 책을 뒤지면서 이상한 흥분을 금하지 못한다.

대부분이 미발표의 시요 가끔 그의 술회와 기원이 두세 줄씩 산문으로 적히우고 가다가는 생각이 막혔던지 낙서가 나오고 만화가 나오고 한다. 줄과 줄, 글자와 글자를 분간하기 어렵게 지우고 고치고 내어박고 달아붙이고 한 이 시들의 전부가 고향, 술, 채무, 인정 같은 것을 읊조린 것인데 그 가운데 이색으로 「제이 엠 에스」라는 시가 있다.

"제이 엠 에스
평양서 나신 인격의 그 당신님 제이 엠 에스
덕 없는 나를 미워하시고
재주 있는 나를 사랑하셨다.
오산 계시던 제이 엠 에스 사오 년 봄만에 오늘 아침 생각난다.
근년처럼 끝없이 자고 일어나며
얽은 얼굴에 자그만한 키와 여윈 몸맵시는 달은 쇠같은 타는 듯한
눈동자만이 유난히 빛났었다.

(1행략)

소박한 풍채, 인자하신 옛날의 그 모양대로
그러나 아 술과 계집과 이욕에 헝클어진 15년에 허주한 나를 웬일로
그 당신님
맘속으로 찾으시노? 오늘아침
아름답다 큰 사랑은 죽는 법 없어 기억되어 항상 가슴속에 숨어 있어
미처 거친 내 양심을 잠재우리 내가 괴로운 이 세상 떠나는 때까지 ……"

구심(舊心, 옛생각) 5. 26. 야서(夜書, 밤에 쓰다)라 하였는데 시방으로부터 6년 전이다. 오산학교를 나온 이들은 제이 엠 에스라는 이니셜로 된 이름이 조만식 선생님이신 것을 알 것이다.

불세출의 천재 소월은 오산학교에서 4년 동안 이 조 선생님의 훈도를 입었는데 이 시인은 그 높게 우러러 존경하던 조선생님께서 하루아침 고요히 그 마음 속으로 찾아오신 때 황공하여 쪼그리고 앉아 머리를 들지 못하고 호곡하였던 것이다.

소월은 이때 그 '정주곽산 배 가고 차 가는 곳'인 고향을 떠나, 산을 넘어 구성군 남시에서 돈을 모으려고 애를 쓰던 때다.

소월이 술을 사랑하고 돈을 모으려고 했으나 별로 남의 입사내(입방아)에 오르도록 계집을 가지고 굴은 일은 없다 하되 그러되 이미 고요하고 맑아야 할 마음이 미처 거칠어진 탓에 그는 이 은사 앞에 엎드려 이렇게 호곡하는 것이다.

소월은 오산학교 때에 체조 한 과목을 내어놓고는 무엇에나 우등을 하였다. 조 선생님은 이렇게 재주 있는 소월을 그 인자하신 웃음을 띠고 머리를 쓰다듬어 사랑하신 모양이 눈앞에 보이는 듯한데 오산을 다녀 나온 자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이 천재시인도 그 마음이 흐리고 어두울 때 역시 그 얽으신 얼굴에 자그만한 키와 여윈 몸맵시의 조만식 선생님을 찾아오시었던 것이다.>


소월을 호곡하게 한 '기억의 상수원(上水源) 같은 곳'. 이것이 오산학교다. 조만식은 이 학교 교장선생이었다.

학생과 학부모를 합해 20여명이 참석한 개교식에서 창립자 이승훈이 발표한 개교사는 이랬다.

"이 아름다운 강산, 선인들이 지켜내려온 이 강토를 원수인 일본인들에게 내맡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총을 드는 사람도 있어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백성들이 깨어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를 짓누르는 자를 나무라기만 해서는 안 된다. 오늘 학교를 세우는 것도 후진들을 가리켜 만분의 일이나마 나라에 도움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힘을 한데 모아서 나라를 빼앗기지 않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 

 

[다석 류영모(유형재 그림과 글씨).]



춘원 이광수와 교대한 물리선생 류영모

류영모가 오산학교에 부임한 때는 1910년 10월 1일이었다. 8월 29일이 국치일이었으니 한달 남짓 지난 무렵. 빼앗긴 들에도 계절은 오고 있었다. 평북 정주엔 곱기만 한 단풍이 들고 산들바람 속에서 갈잎의 노래가 들려왔다. 교사 류영모가 간 오산학교엔 아직 1회 졸업생도 배출하지 못했다. 4년제 학교에서 아직 3학년이 최고 학년이었던 때다. 1907년 12월 24일에 설립했으니 3년이 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생은 모두 합쳐 80여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한옥이었던 오산학교에는 딴 지역에서 유학을 온 학생들이 합숙을 했다. 전원이 기숙사 생활이었다. 교사 류영모는 당시 3학년이던 김여제, 이인수와 한 방을 쓰며 기거했다. 교사와 학생이 나이도 어슷비슷했다.

한해 전에 먼저 온 선생으로 춘원 이광수가 있었다. 과학 교사를 맡고 있던 이광수(1892~1950)는 18세였고, 류영모는 두살 위인 20세였다. 이후 류영모가 수학과 물리화학, 천문학을 맡게 된다. 류영모가 당시 교재로 쓰던 물리교과서를 훑어 보니, 서울 종로에 있는 출판사 보성관에서 번역한 한자투성이의 책이었다. 우선 한자부터 가르쳐야 읽기라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오산학교의 아침 풍경은 이랬다. 학생들은 새벽 기상종에 맞춰 일어나 열을 지어 구보를 하며 황성산(黃城山) 일대를 한 바퀴 돌았다. 오산동 북쪽에 있는 이 산은 누런 점토로 축조한 토성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학생들은 구령에 맞춰 교가를 제창했다. "뒷뫼의 솔빛은 항상 푸르러/비에나 눈에나 변함 없이/이는 우리 정신 우리 학교로다/사랑하는 학교 우리 학교" 이 교가 소리에 맞춰 마을사람들은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이 교가를 지은 사람은 교사 여준이었다. 그는 수신(도덕), 역사, 지리, 산수를 가르치던 선생이다. 열심히 구령을 부르며 구보하는 학생을 이끄는 교사는 서진순이었다. 전라도 장성 출신으로 육군 연성학교를 나왔기에 학생들의 체조와 훈련을 담당했다. 깐깐한 교사로 스파르타 교육을 했다. 

구보를 마친 학생들은 학교 앞을 흐르는 개울에서 소금으로 이를 닦고 얼굴을 씻었다. 이윽고 종이 울리고 학생들은 아침 식사를 했고 공부를 시작했다. 학교 설립자인 이승훈은 여준 선생에게 글도 배웠고, 학생들과 함께 운동장을 쓸고 화장실 청소를 했다. 이승훈에 대해서, 오산학교 출신인 함석헌이 지은 시조가 남아 있다.

"남강(이승훈의 호)이 무엇인고 성(誠, 정성)이며 열(熱, 열정)이로다 / 강(剛, 굳셈)이며 직(直, 곧음)이러니/의(義, 옳음)시며 신(信, 믿음)이시라/나갈 젠 단(斷, 단호)이시며 그저 겸(謙, 겸손)이시더라

일천년 묵은 동산 가꾸잔 큰 뜻 품고/늙을 줄 모르는 맘 어디 가 머무느냐/황성산 푸른 솔 위에 만고운(萬古韻, 만년의 운치)만 높았네"

이광수가 지은 오산학교 교가

한편 일본에서 중학교를 나온 춘원 이광수가 교사로 온 뒤, 문학 자질을 발휘하여 교가를 새로 지었다. 요즘도 불리는 오산의 교가다.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랭자인의 곡을 붙였다. 

"네 눈이 밝구나 엑스빛(레이) 같다/하늘을 꿰뚫고 땅을 들추어/온가지 진리를 캐고 말련다/네가 참 다섯메(오산)의 아이로구나" 

류영모는 그 무렵에 열렸던 정주군 학교 연합 체육대회를 기억해냈다. 나라가 망하는 이유가 교육이 없어서라는 지적이 나오면서, 사람들이 그야말로 있는 힘을 다해 학교를 세우려고 했다. 정주에만 70여개교나 됐다. 학교만 많았지 학생수는 볼품이 없었다. 대운동회를 하는데, 교기를 든 기수 빼고 나팔수 빼고 북치는 사람 빼니 운동할 선수가 없었다. 학교이름 '○○之校(지교)'를 잘못 읽어서 '○○上校(상교)'로 읽는 판이니, 운동회가 요즘의 개그 프로를 방불케 했다.

그래도 류영모는 이 풍경을 기억하면서 한 마디 더하기를 잊지 않았다. "그때는 분명 석기시대였어요. 하지만 철기시대의 기구를 만든 건 바로 석기시대의 돌이었다는 사실."

다석어록 = 처음 만난 생면부지의 사람인데도 서로 말을 주고 받으면 공명을 느껴 금방 동지가 될 수 있다. 이런 일은 흔하지가 않다. 죽을 때까지 사귈 수 있는 친구도 이렇게 맺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사상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나라는 사람을 알고 몇 백리 밖에서 찾아오는데 죽마고우를 만나는 것같이 금방 익숙해진다. 하룻밤을 새더라도 참 즐겁다. 평생 다시 만날지도 모르고 알려질지도 모르는 나를 찾아와서 예수교, 불교, 유교는 다 다를지 모르나 진리는 하나밖에 없는 것을 얘기하니 이보다 더 좋은 즐거움이 어디 있겠는가.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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