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나의 성자 다석 류영모](12)가르침만이 희망이었다

2020-01-08 13:36
  • 글자크기 설정

경신학교 학생에서 오산학교 교사로…지금 깨닫지 못하면 누가 망국을 막겠는가

[다석 류영모 선생.]




오직 가르침만이 희망이었다, 학교란 무엇인가
세상을 시작하는 아이에게, 두리번거리는 마음과 기웃거리는 마음을 불어넣은 이는 누구일까. 누가 인간에게 호기심이란 동력을 심어놓았을까. 그 호기심이 생을 진전시키고 경험을 축적하고 생각을 넓히는 어마어마한 에너지라는 걸 맨 처음 발견한 이는 누구일까. 호기심을 끌어모아 생각을 넓히는 곳을 만들 생각을 한 사람은 누구일까. 인간은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으로 배워야 할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해낸 사람은 누구일까. 그 배움을 실천할 학교를 맨 처음 연 사람은 누구일까. 학교를 열어 쌓은 지식을 새로운 세대에게 전하고자 했던 선각자는 누구일까. 마치 신과 인간이 서로 닿은 손끝으로 어떤 '뜻'을 넘겨주듯, 가르침과 배움이라는 기적이 일어났다. 인간에게 학교가 생겨난 것이다. 획기적인 인간 진화가 그로부터 시작됐다.

역사는 하나의 거대한 학교이며 층층의 교실이기도 하다. 세계는 또한 하나의 광대한 학교이며 칸칸의 교실이다. 인생이란 시간은 100년의 학교이며 시간제 수업들이기도 하다. 종교 또한 하나의 학교이며 교과서들과 참고서들로 가득 찬 도서관이다. 태초의 학교는 말씀이 존재하는 우주였고, 목숨의 첫 학교는 모체 속이었다. 인간 생명의 학습본능이 실현되는 과정을 누군가가 구체적인 실행파일로 만든다. 그것이 교육이다. 현실적인 공간과 시간, 시스템과 프로그램과 커리큘럼, 인간관계로 실현한다. 그것이 학교다. 체계적 성장과 성숙의 장(場)은 '인간'을 업그레이드한다. 교육이 백년대계인 까닭은 사람을 혁신시키는 뚜렷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나라를 잃은 조선은 그 구성원들이 제대로 성장하고 성숙할 시스템을 가지지 못했다. 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사람들이 마치 굶주린 사람처럼 허기진 표정으로 '학교'를 세우는 풍경을 생각한다. 이 땅의 사람들은 모든 희망이 암전(暗轉)된 식민지의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고 있었다. 짐승의 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선 생각을 전할 언어가 필요했다. 생각을 다듬을 지식이 필요했다. 생각을 펼칠 비전이 필요했다. 생각을 깊고 높은 곳으로 이끌 믿음이 필요했다. 우리는 지금, '배우는 것'이 곧 독립운동이던 시간으로 이동할 것이다. 캄캄한 절망을 뚫는 깨우침과 깨달음으로 나아가기 위해 온 나라의 어두운 백성들이 몸부림치던 그 한복판에서 류영모를 만날 것이다.

한일합병 직전의 19세 소년선생

1909년 여름, 학생 36명 중에서 성적이 수석이었던 경신학교 3학년 류영모는 다른 학교의 교사로 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경기도 양평의 신설학교였다. 군청의 주사보였던 정원모가 세운 학교로, 당시 상황으로 봐서 학생이 10명도 안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어디에 있던 학교인지 구체적인 내용이 드러나 있지 않지만, 천년 된 은행나무(천연기념물 30호)를 봤다는 류영모의 말을 참고하면 용문산 아래 용문사 근처였을 것이다.

학교를 세우는 것이 나라를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당시 사람들은 우선 설립부터 해놓고 봤다. 학생들은 몇 명 구했는데 가르칠 선생이 없으니, 마치 입도선매(立稻先賣)하듯 다른 학교 재학생인 류영모를 교사로 뽑아간 것이다.

교단에 선 류영모가 살펴보니, 학생 중에는 류영모보다 나이가 많은 이가 여럿이었고 장가를 든 이도 있었다. 이 학교에서 류영모는 수업 중에 일본에 대한 비판을 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밤에 류영모가 있던 하숙집에 일제 헌병보조원들이 찾아와 "너 이 자식 조심해"라며 위협을 했다. 이 시골에서도 마음 놓고 바른 말을 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류영모는 정확하게 1년 만인 1910년 여름에 집으로 돌아왔다. 갈수록 뒤숭숭해지는 시절이었다. 그해 9월 28일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고 나라는 사라져 버렸다. 그 사라진 나라에서 이제 성년이 된 스무살 류영모는 터질 듯한 심장을 벌럭거리며, 11월 20일 황성신문에 실린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오늘 목놓아 통곡하노라)'을 한 글자 한 글자 가슴에 끌로 새기는 아픔으로 읽었다. '당일조대한통읍(當一朝大韓痛泣, 하루아침에 대한이 비통하게 우는구나)' 일곱 자를 더해 그의 통곡을 더했다.

오산학교와 이승훈

이승훈은 1864년생으로 류영모보다 26살 위다.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어머니(홍씨)를 여의었다. 할머니 품에서 자라난 그는 10살 때 할머니와 아버지를 잃었다. 두 달 간격으로 일어난 비극이었다. 졸지에 고아가 된 소년은 11살에 유기공장 부자였던 임일권의 심부름꾼으로 일한다. 주인의 사랑방을 청소하고 재떨이, 화로, 요강을 비우고 씻는 일을 했다. 그는 주인이 버리는 종이를 모아두었다가 틈틈이 글씨공부를 한다. 소년의 학문적 열의를 알게 된 임일권은 직접 글을 가르쳐주었고, 이후 그를 깊이 신임하여 돈을 관리하는 수금일을 시켰다.

그가 15살이 됐을 때, 이도제라는 사람이 사위로 삼겠다고 나섰다. 결혼을 한 이승훈은 임일권의 집에서 나와 가정을 꾸렸다. 그는 임일권의 유기그릇을 떼어다가 파는 행상이 됐다.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10년간 번 돈으로 유기공장을 차린다. 모자라는 돈은 장사하면서 알게 된 평안도 갑부 오삭주에게서 빌렸다. 공장을 차린 이승훈은 일터를 깨끗이 했다. 노동자들에게 작업복을 지어서 입혔다. 또 품삯도 후하게 주었다. 이승훈의 공장은 금방 소문이 났다.

사업은 번창하기 시작했다. 평양에 지사를 냈으며 서울에도 지점을 갖췄다. 이승훈은 조선에서 손꼽히는 상인으로 성장한다. 당시의 유행을 따라, 돈으로 참봉 벼슬을 사서 '양반'이 됐다. 이승훈은 문중을 일으켜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용동에 땅을 사고 집을 지어 종친들을 모았다. 여주이씨 집성촌을 만들었다. 마을엔 서당을 지어 '강명의숙'이란 간판을 달았다. 빈곤과 무교육과 '상것'의 한을 모두 푼 셈이다.

1905년 그의 나이 42세 때 을사조약이 맺어졌고, 나라 안에서는 민영환이 자결했고 나라 밖에서는 이준이 독립을 외치며 죽음을 맞았다는 소식을 듣는다. 나의 성취나 성공이란 게 대체 무엇인가. 나라를 빼앗긴 사람에게 이런 것들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안창호가 이승훈을 깨우다

1907년 이승훈은 안창호(1878~1938)가 평양 모란봉 기슭에서 연설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창호는 농촌재건운동을 벌였고 미국으로 건너가 교민 자치기구인 공립협회를 설립해 활동하다가 귀국한 29세의 청년이었다. 안창호는 귀국하자마자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신민회를 조직한다.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해 전국을 다니며 강연을 하고 있었다. 비장하면서도 차분한 안창호의 목소리는 청중을 사로잡았다.

"나라를 회복하는 오직 한 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삼천리 방방곡곡에 새로운 교육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2천만 겨레가 사람마다 인덕과 지식과 기술을 가진 인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서로 믿고 돕는 거룩한 단결을 이루는 것입니다."

담담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이승훈은 천둥과 지진을 함께 만난 것 같은 깊은 울림을 느꼈다. "선생의 음성은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았습니다. 중음계였죠. 부드럽고도 비장한 목소리였습니다. 미사여구를 쓰지도 않았고 어려운 말도 없었습니다. 솔직 간결한 말투를 툭툭 던지면서 사람들의 생각을 일깨우고 숨어 있던 마음을 힘있게 끄집어 냈습니다." 안창호의 말투는 고요하게 흐르는 물결 같았다. 세계의 대세를 말하고 이 나라의 국제적 지위가 빈약하고 위태하여 국가존망이 경각에 있음을 경고했다. 정부 관리들이 부패했음을, 국민이 무기력함을 한탄했다. 이 민족의 결점을 지적할 때는 가차 없었다. 지금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힘쓰지 않으면 누가 망국을 막겠느냐고 부르짖을 때는 안창호의 목소리가 울고 있었고, 청중들이 따라 흐느꼈다. 연설이 끝나자, 사람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 서슴지 않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이승훈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 북적이는 사람들을 헤치고 연단 쪽으로 나아갔다. 막 단상에서 내려오는 안창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제부터, 이제부터는 안 선생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겠소." 그러자 안창호는 말했다. "선생과 곧 조용히 논의할 것이 있을 것입니다." 45세 이승훈과 29세 안창호가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 장면이었다. 이튿날 이승훈은 안창호가 보낸 사람을 따라가 그를 만났다. 안창호는 그에게 신민회 평안북도 총감(책임자)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알겠습니다. 올해 안으로 오산에 신식학교를 세우겠습니다." 이승훈이 말하자, 안창호는 이렇게 말했다. "예, 저도 평양에 학교를 설립하고자 합니다." 이승훈은 문득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은 것 같았다. 평양에 올 때는 무거운 걸음이었는데, 정주로 돌아갈 때는 바쁘고 힘찬 걸음이었다. 이날 이후 그는 술과 담배를 끊었고 상투를 잘랐다.

꺼져가는 나라에 희망을 육성하다, 오산학교의 기적

안창호는 이승훈의 '열정'을 어디에 써야 할지 방향을 잡아준 사람이었다. 이승훈은 '위대한 미션'을 단박에 알아듣고 오산학교를 창립한다. 안창호를 만난 그해 12월 24일이었다. 안창호가 평양에 세우기로 약속했던 대성학교보다 먼저 개교를 한 것이다. 그만큼 이승훈은 온힘을 다해 학교 설립에 매진했다. 용동에 세운 문중 서당 강명의숙을 신식학교로 바꿔 소학교를 만들었고, 향교인 승천재를 수리해 중학교 과정인 오산학교를 설립했다. 관서 지방의 80세 유학자 백이행을 초대 교장으로 모셨고, 막역했던 박기선에게 교감직을 맡겼다. 학생은 7명이었다. 이 작은 학교가 일제 36년 민족사의 핵심인재들을 배출한 최고의 요람이 된다. 안창호의 뜻과 이승훈의 열정이 스파크를 일으켜 민족정신의 메카를 창출한 것이다.

우선 교사가 급했다. 배울 사람만 있고 가르칠 사람이 없었던 오산학교였다. 설립자 이승훈의 마음은 다급했다. 그는 18세의 이광수를 찾아냈다. 일본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 진학을 준비하던 학생으로 고국의 조부가 위독한 바람에 귀국했던 때였다. 이승훈은 이광수에게 사정 반 강요 반으로 교사직을 맡겼다. 물리와 화학 과목을 담당하라고 했다. 얼마나 아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일단 선생이 있어야 했기에 그냥 강단에 세운 것이다.

3년 뒤인 1910년 이승훈은 교사를 구하러 서울의 경신학교를 찾아갔다. 당시 경신학교 교장 밀러(Miller·密義)는 안창호의 결혼식에서 주례를 선 인연이 있었다. 밀러는 류영모에게 과학을 가르쳤던 교사이기도 했다. "(류영모는)최우수 성적을 받은 학생이죠. 과학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습니다. 교사를 시켜도 잘해낼 겁니다." 밀러의 천거를 받은 이승훈은 류영모의 집으로 찾아갔다. 이후 류영모는 오산학교의 과학선생이 되었다. 1910년 8월 29일엔 국치를 당했고, 한달 뒤인 9월 말에 그는 평안북도 정주로 향했다. 류영모가 부임한 것은 가장 암울하고 절망적인 시기였던 해의 가을(10월 1일)이었다.

# 다석어록= 식자우환이라지만 참으로 알면 괜찮은데 반쯤 아니까 우환이다. 이 세상이 괴롭고 혼란된 것은 반쯤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렇다. 반쯤 깨게 하다가 그만두려면 애초에 깨우지 않는 것이 낫다. 글을 읽을 때 입으로만 읽으면 그것은 원글을 읽는 것이 아니다. 글을 줄줄 읽는 가운데 그 글이 내 속에 피가 되고 마음이 되어야 한다. 그것을 체득이라고 한다. 

다석전기 집필 = 다석사상연구회 회장 박영호
증보집필 및 편집 = 이상국 논설실장
@아주경제 '정신가치' 시리즈 편집팀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0개의 댓글
0 / 300

로그인 후 댓글작성이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닫기

댓글을 삭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이미 참여하셨습니다.

닫기

이미 신고 접수한 게시물입니다.

닫기
신고사유
0 / 100
닫기

신고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 담당자가 확인후 신속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닫기

차단해제 하시겠습니까?

닫기

사용자 차단 시 현재 사용자의 게시물을 보실 수 없습니다.

닫기
공유하기
닫기
기사 이미지 확대 보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