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靈) 능력자'라는 독특한 직함을 지닌 차길진 후암미래연구소 회장(72·전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이 3일 오전 3시 지병으로 타계했다. 그는 편도암에 이은 악성 뇌종양으로 긴 투병생활을 했다. 차 회장은 '차길진 법사'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구명시식(救命施食)이라고 이름 붙인 초혼위령제로 명성이 높았다. 영혼을 불러내어 달래는 '천도재' 의식인데, 그는 최면이나 영매 같은 보조 수단 없이 바로 영(靈)과 통하는 능력자로 꼽혔다. 김희선 박사(한국 심령과학협회장·전 서울대 교수)는 그를 '사람'이라 보기 어렵다며, 외계인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차 법사는 대체 어떤 분이며 어떤 생을 살았을까.
# '천수관음'으로 불렸던 다재다능과 사방팔방 실력자
[삶의 기억] 차길진 선생은 1947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났다. 문화기획자, 사학자, 언론인, 작가 등으로 활약하는 그를 가리켜 '천수관음(천개의 손을 가진 관음보살)'이라고 일컫기도 한다. 2008년부터 약 10년간 한국야구위원회 넥센 히어로즈(현 키움 히어로즈) 구단주 대행을 맡았으며, 한겨레아리랑연합회 이사장, 차일혁기념사업 회장,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운영자문위원, 경찰박물관 운영위원을 맡았다. 공연에서도 역량을 드러냈는데, 창작대중가극 '눈물의 여왕'과 오페라 '카르마'를 제작했다.
2014년에는 공연예술계에 기여한 공로로 화관문화훈장을 받는다. 2015년엔 아리랑 보급의 공로를 인정받아 '2015 아리랑상'(한겨레아리랑연합회 시장)을 받았다. 그는 또 시인으로 활약하여 '그토록 그리움이'라는 시를 발표했다(이 시는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어 노래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는 또 서울 송파구 석촌동과 충남 유성 계룡산, 미국 뉴저지, 일본 등 4곳에 후암정사를 설립해 종교적인 활동(조계종 국제포교사)을 한 바 있다. 그는 많은 책을 냈다.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 수기', '애정산맥', '영혼의 목소리', '죽었다 살아난 사람들', '한 마리 까치 되어', '영혼은 비자가 없다', '영혼의 엑스파일', '영혼을 다스리는 49가지 이야기', '영혼을 팔아먹는 남자 이야기', '어느날 당신에게 영혼이 보이기 시작한다면', '또 하나의 전쟁',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선물', '영혼산책' 등이다.
# 차길진의 뿌리 : 차치구-차경석-차일혁, 4대에 걸친 저항과 애국정신
그를 한껏 유명해지게 한 것은 그의 뿌리였다. 그의 증조부 차치구(車致九)는 전봉준의 참모로 우금치 전투에서 잡혀 화형당한 동학혁명의 선봉장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형제인 차경석(車京石·1880~1936)은 보천교의 교주(천자)였다. 전북 정읍 입암산에 본부를 두었던 보천교는 일제강점기 조선 최대의 민족종교 단체다. 보천교와 차경석은 박경리의 소설 '토지'에도 등장하며, 이 종교단체는 당시 인구 1200만명 중 300만명의 신도를 거느렸다고 한다. 보천교의 본부 건물은 1936년 일제에 의해 해체되고 그 자리에 선 것이 조계사 대웅전 건물이다. 그의 아버지 차일혁(車一赫·1920~1958)은 1950년대 제18전투경찰대장으로 빨치산 토벌을 했던 사람이다. 이현상과 전투를 벌였던 그 총경이다. 이현상은 차일혁에 대해 비록 적이지만 훌륭했다는 말을 남겼다. 두 사람은 빨치산 전투를 치르면서 인명사살을 최소화하자는 약속을 하기도 했다.
차일혁은 전쟁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총을 겨눠야 했던 비극을 이후에 깊이 앓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 숱한 죽음에 대해 인간적인 가책을 느끼고 괴로워하다가 의문의 익사로 생을 마감했다. 금강에서 수영을 하던 아버지가 가만히 가라앉을 때 12살 아들 차길진은 그 모습을 보고 충격에 빠졌다. 그의 생은 여기서부터 다시 출발했는지 모른다. 그는 아버지의 영혼을 달래고 적군 이현상과 빨치산들, 그리고 남북의 모든 전쟁 피해자들의 영을 위로하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그는 억울한 죽음을 당한 영혼체가 흩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집착이 많은 영들을 흩어지게 하는 해원(解冤)의 생을 시작한다. 그 매개 역할을 하는 영매를 자임하게 된 것이다.
# 빨치산 토벌대장 부친과 억울한 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차길진은 작년 4월 3일 한 언론(스포츠월드)에 '잘 죽는다는 것'에 대해 칼럼을 기고했다. 칼럼니스트이자 정치평론가인 어느 분과의 인연에 대한 얘기다. '잘 살진 못했지만 잘 죽고 싶다'는 제목의 칼럼을 쓴 분이었는데, 막역한 사이가 되어 여행을 함께 했다. 강원도에서 차 선생이 카메라를 들고 그의 사진을 찍었는데, 사진이 이상하게 나왔다. 얼굴이 빛바랜 사진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다. "빛이 들어온 것이겠지요." 이렇게 말했더니, 사진 전문가인 그가 "이 각도에서는 빛이 들어오지 않거든요"라고 했다.
차 선생은 입을 열었다. "앞으로 3년을 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담배도 끊고 술도 줄이십시오." 그렇게 말하자, 그는 웃으며 "저주를 하시는 건 아니죠"라고 말했다. 차길진 선생의 말. "이미 정해진 운명이니 남은 시간 재미있게 사십시오." 3년 뒤 그는 정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마지막 그가 한 말은 이랬다. "정말 운명이 정해져 있었던 겁니까?" 차 선생은 말했다. "예. 하지만 누구보다 잘 죽을 수 있습니다. 큰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위로했다. 섬뜩하지만, 이것이 고인이 작년에 남겼던 칼럼이라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차길진은 2002년 한국의 월드컵 4강 진출과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명박 대통령 당선을 예언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예언들에 대한 경탄이나 신뢰는 언론이 해야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다만 주역의 지혜처럼 일의 흐름과 시대의 전환, 그리고 삶의 기복을 성찰하는 탁월한 안목으로만 이해해도 충분히 놀랄 만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는 '미래'를 꿰뚫는 형안을 가진 사람답게 우아한 예언 하나를 해준다. 이른바 부자가 되는 3대 비법이다. 첫째, 부자는 그냥 되는 게 아니라 조상의 음덕이 있어야 한다. 이건 아무리 노력해도 부자가 될 수 없다는 걸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잘 베푸는 공덕을 쌓다 보면 자신은 그 성취를 맛보지 못하더라도 후대가 받을 수 있으니, 겸허하고 어질어야 한다는 얘기다. 둘째, 부자는 단순해야 한다. 부자는 무식하게 일만 하는 머슴도 쓰지 않고 너무 사근사근한 머슴도 쓰지 않는다. 머슴이 입을 굳게 다물고 쉽게 웃지 않는 자도 쓰지 않는다. 인재를 어떻게 고르느냐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셋째, 부자는 작은 인연을 큰 인연으로 만든다. 한번 맺은 인연을 어떻게 깊게 하고 넓게 하느냐가 부자가 되는 핵심이라고, 그는 특유의 통찰력으로 말을 한다. 시대를 풍미하고, 전 시대를 해원한 저명한 예언가 한 사람이 낙엽이 가득한 어느 십이월 초입에 '영혼산책'을 떠났다. 평안한 영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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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길진(1947~2019) 아내 김정옥, 아들 현석(극단 후암 대표), 딸 소영((주)에이치앤씨후아이엠 대표).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발인 5일 오전 7시 30분, 장지 서울추모공원(대전 유성구 선영, 1588~5700)
이상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