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무역협상 1단계 합의의 전제 조건으로 제시한 기존 관세 철회의 성사 여부를 놓고 미·중 양측이 진실 게임을 벌이고 있다.
중국은 관세 철회를 기정사실로 못 박은 반면 미국 측은 공식적인 입장 표명을 미루는 상황이다.
◆시진핑 버티기 전략 통했나
미국 측과 관세 철회에 합의했다고 주장하는 중국은 무역협상 1단계 합의를 위한 후속 조치에도 착수했다.
가오펑(高峰) 중국 상무부 대변인은 지난 7일 브리핑에서 "지난 2주간 미·중 고위급 무역협상 대표가 상호 핵심 우려를 적절히 처리하는 것과 관련해 진지하고 건설적인 논의를 했다"며 "양측은 단계별로 관세를 철회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가오 대변인은 "만약 미·중 양국이 1단계 합의를 이룬다면 합의 내용에 따라 동등한 비율로 이미 부과된 추가관세를 철회해야 한다"며 "이는 합의를 이루기 위한 중요한 조건"이라고 말했다.
미국의 추가 관세 부과로 시작된 무역전쟁이 종료되려면 관세 철회가 선행돼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미·중 무역전쟁이 발발한 이후 미국은 3600억 달러 규모의 중국산 제품에 최고 25%의 고율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가오 대변인의 발언이 전해진 뒤 관영 신화통신 등은 "해관총서와 농업농촌부가 미국산 가금류의 대중 수출 제한 해제를 검토 중"이라고 보도했다.
미국산 농·축산물 구매 확대를 본격 추진하겠다는 신호다.
관세 유예를 고수하던 미국이 관세 철회를 받아들인 데 대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지구전 전략이 통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잇따랐다.
미국의 거센 압박에도 버티기로 일관하던 중국이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입지 변화와 미국 경제의 악화 가능성에 힘입어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 모멘텀을 잡았다는 것이다.
현재 트럼프 대통령은 탄핵 위기에 몰려 있고, 지난해 분기별로 3% 가까이 성장하던 미국 경제는 지난 3분기 성장률이 1.9%로 급락한 상태다.
다만 관세 철회 여부에 대한 미국의 태도가 애매하다.
아직 정부 차원의 공식 입장이 나오지 않은 가운데 소식통을 자처하는 이들의 주장이 엇갈린다.
전날 로이터와 블룸버그 등은 익명의 미국 관리를 인용해 미·중 양국이 1단계 무역합의 내용 중 기존 관세를 단계적으로 철폐하는 사안이 포함됐다고 전했다.
하지만 피터 나바로 백악관 무역·제조업 정책국장은 폭스 비즈니스 네트워크에 출연해 "현 시점에서 1단계 합의 조건으로 기존 관세를 철회한다고 합의된 사항이 없다"고 중국 정부의 발표 내용을 부인했다.
그는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트럼프 대통령뿐"이라고 선을 그었다.
◆트럼프 결단에 이목 집중
이제 공은 트럼프 대통령의 수중으로 넘어간 모양새다.
애초에 미·중 무역협상이 진전을 보이게 된 주요 요인 중 하나가 트럼프 대통령이 정치적 위기를 맞은 탓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스캔들'로 궁지에 몰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정부 측에 조 바이든 전 부통령 일가에 대해 수사하라고 외압을 행사했다는 의혹이다.
민주당은 비공개로 진행하던 탄핵 조사를 공개 청문회로 전환할 예정이다.
여기에 트럼프 취임 직후 주요 선진국 중 비교적 높은 수준의 성장률을 기록해 온 미국 경제가 올 들어 침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정치·경제적 위기 탈출을 위해 중국과의 무역 합의 성사 등 자신의 치적으로 내세울 만한 이벤트 마련이 시급해졌다.
트럼프 대통령이 대중 관세의 단계적 철회에 동의한다면 양측 협상은 급물살을 탈 수 있다. 연내 트럼프 대통령과 시 주석이 만나 합의안에 서명하는 장면도 가능하다.
우여곡절 끝에 1단계 합의에 이르더라도 내년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다면 상황이 급변할 수 있다.
중국의 기를 꺾어 패권을 유지하겠다는 미국의 입장과 핵심 이익을 포기하면서까지 미국에 굴복할 수 없다는 중국의 입장에 한 치 변화도 없는 탓이다.
한 베이징 소식통은 "미국이 관세 철회 카드를 수용할지가 미·중 무역전쟁의 전반부 판도를 좌우할 분수령이 됐다"면서도 "무역전쟁 종전을 위한 최종 합의까지 협상이 원만하게 진행될 것으로 예상하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