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브라가 기존 통화의 체계 자체를 흔들 수 있다는 점에서 세계 각국 정부와 금융기관, 정책 결정권자들이 날 선 비판을 쏟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부의 지원 없이는 암호화폐가 제도권에 들어가기 쉽지 않음을 방증한 셈이다.
이처럼 정부의 지원에 따라 암호화폐의 생존이 결정되는 것은 하루 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됐다. 시 주석이 24일 "블록체인이 주는 기회를 잘 활용해야 한다"고 발언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트코인 가격은 40% 치솟았다.
시 주석이 암호화폐를 직접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관련한 블록체인 기술에 대해 최초로 구체적 언급을 한 것인 만큼 암호화폐 시장에 긍정적 시그널을 제공했다는 분석이다.
주요국의 중앙정부들이 민간 암호화폐를 '정식 돈'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암호화폐가 지닌 '힘'을 보여준다. 암호화폐가 중앙은행이 찍어내는 돈을 능가할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다.
실제로 각국의 중앙은행은 전자적 화폐 발행에 대한 논의에 한창이다. 민간 암호화폐를 정식 화폐로 인정하진 않더라도, 중앙은행이 암호화폐를 직접 발행하고 이에 따른 파급 효과를 살피고 있다.
한국은행도 지난해 '가상통화 및 디지털화폐 공동연구 TF'를 꾸려 연구를 진행해, 올 1월 '중앙은행 디지털화폐' 보고서를 내놨다.
당시 한은은 보고서를 통해 "우리나라의 경우 아직은 디지털화폐 발행 필요성이 크지 않다고 판단된다"면서도 "현금이용 비중이 지속 하락하는 등 지급결제 환경의 변화에 대비해 한은은 앞으로도 디지털화폐와 관련된 각국 중앙은행의 대응, 기반기술의 발전상황을 예의주시하면서 자체 연구를 지속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암호화폐 도입에 대한 실질적인 검토에 나선 국가들도 있다. 스웨덴은 중앙은행이 암호화폐를 직접 발행하는 것에 대한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내년까지 기술 검토를 완료해 2021년 여론수렴 절차를 거쳐 발행 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다.
러시아는 암호화폐를 지급결제 수단으로 허용하는 데 가장 적극적이다. 지난 2017년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러시아판 암포화폐인 '크립토루블'을 발행하겠다고 공식 발표하면서다. 서방 국가의 금융 제재망을 뚫을 통로가 절실한 만큼 돈으로 인정되는 암호화폐가 나온다면 러시아가 첫 사례가 될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밖에 우루과이, 튀니지 등 개발도상국들이 자국의 부족한 금융서비스 인프라를 극복하기 위해 암호화폐 발행을 고려하고 있다.
일부 국가를 중심으로 암호화폐 허용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면서, 시장에선 화폐의 패러다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 '화폐 혁명'이 현실화될 경우 미국과 유럽연합은 기축통화국 지위를 잃게 되고, 각국의 통화정책 방향도 완전히 뒤바뀌는 등 적지 않은 파장이 예상된다.
민간의 금융거래 역시 '대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현금결제가 아닌 이상 모든 거래 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은행을 더 이상 이용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지급결제가 개인 간(P2P) 또는 기업 간(B2B) 직접 이뤄진다는 의미다. 거래장부 역시 개인이 직접 관리하게 돼 시중은행은 생존의 갈림길에 설 수밖에 없게 된다.
◆'자산성' 공인받은 비트코인, 제도권 진출 가능할까
그렇다면 암호화폐는 중앙은행과 손잡을 수 있을까. 현재로선 가능성이 낮다. 중앙은행이 암호화폐를 인정하더라도 민간 화폐로 끌어들이기보다 직접 발행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암호화폐는 돈이 아니라는 국제기구의 최근 결론이 결정적이다.
앞서 지난달 23일 국제회계기준위원회(IASB) 산하 국제회계기준(IFRS) 해석위원회는 암호화폐를 금융자산으로 분류할 수 없다고 결론 지었다. 암호화폐가 재화의 교환수단으로 사용될 수는 있지만, 현금처럼 재무제표에서 모든 거래를 인식하고 측정하는 기준은 될 수 없다는 설명이다.
그럼에도 시장에선 암호화폐의 '자산성'이 공인됐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해석위는 암호화폐를 특허권과 상표권과 같은 무형자산이나, 팔기 위해 보유하는 상품·원재료와 같은 재고자산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당장 돈처럼 거래하진 못하더라도, 돈으로 교환 가능한 자산으로 인정된 만큼 세계 금융시장에 발을 디디게 된 것이다.
중국은 이미 정부 차원에서 디지털화폐(CBDC) 발행을 추진 중이다. 한국금융연구원이 27일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이 은행을 대상으로 디지털화폐 발행 및 회수 업무를 담당하는 방식으로 CBDC가 발행될 것으로 전망했다. 현재 디지털화폐 체제의 기술적 측면 및 안전성을 점검하기 위해 중국인민은행, 은행 및 민간이 참여한 비공개 검증 실험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내년 상반기에 디지털화폐가 발행, 유통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암호화폐의 대표 격인 비트코인에 대한 관심도 집중되고 있다. 비트코인이 제도권 진출을 시도할 때마다 가격이 출렁였는데, 이번을 계기로 '중앙' 진입 발판이 마련됐다고 평가되기 때문이다.
지난 5월에는 뉴욕증권거래소(NYSE) 모회사인 인터컨티넨털익스체인지(ICE)가 만든 암호화폐 선물거래소 벡트가 비트코인 선물거래를 시작할 것이란 전망에 비트코인 가격을 1000만원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막상 시작된 벡트 서비스에 시장 참가자들은 실망감을 표했고, 비트코인은 다시 1000만원 아래로 내려앉았다.
비트코인 상장지수펀드(ETF)와 관련해서도 이 같은 흐름을 엿볼 수 있다. 지난 9일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가 시카고상품거래소(CME)의 비트코인 ETF 출시 계획을 불허하자 비트코인 가격은 하락 전환했다. 하지만 이는 '자산' 비트코인에 대한 시장의 관심이 그만큼 높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투자자들, 암호화폐 반등에 주목
암호화폐 전문가인 존 토다로는 지난 24일 시진핑 주석의 발언에 대해 '저커버그의 리브라 청문회 이후 가장 강력한 변곡점'으로 평가했다.
리브라 청문회 이후 암호화폐가 제도권에 진입하기 힘들 것이란 우려에 비트코인은 하락세를 면치 못했지만, 시 주석의 발언이 비트코인 가격 추세를 한순간에 반전시켰다. 800만원대까지 떨어진 비트코인은 단숨에 1100만원을 넘어섰다.
투자자들은 비트코인의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현재 시장에서는 "내년 초 비트코인 가격이 5만 달러까지 폭등할 것"이라는 시각과 "오히려 각국 정부의 코인시장 관리가 더 엄격해질 것"이라는 반대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긍정 여론은 시진핑 주석 발언을 높게 평가했다. 암호화폐와 관련된 시 주석의 첫 발언이라는 점에서 대규모 상승장이 열릴 수 있는 것으로 내다봤다. 비트코인이 급격한 가격 상승을 보이면서 투자심리가 개선되고, 비트코인 강세론자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유명 비트코인 애널리스트 플랜비는 독자적인 비트코인 가격 모델인 스톡 투 플로우(Stock-to-Flow, S2F) 분석을 통해 "비트코인이 2021년 크리스마스 전에 10만 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진단했다. S2F 모델은 이용 가능하거나 보유한 자산을 연간 생산량으로 나눈 것으로, 자산의 희소성에 따라 가치가 상승한다.
반면, 블록체인 산업 육성과 암호화폐는 별개로 봐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시 주석은 "블록체인 표준화 연구에 힘써 국제적인 발언권과 규칙 제정권을 높여야 한다"며 "중국이 블록체인 분야에서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를 두고 암호화폐가 아닌 블록체인에만 초점을 둔 발언으로 풀이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예측한 것으로 유명한 피터 시프 유로퍼시픽캐피탈 대표는 "다시 비트코인의 변동성이 심화하며 상대적으로 안전자산이라는 인식에 균열이 발생하는 중"이라며 "비트코인을 일본 엔화, 스위스 프랑, 금 같은 안전 자산으로 취급할 수 없고 비트코인이 5만 달러를 넘어설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내년 6월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의 코인 자금세탁 차단 정책을 계기로 비트코인 변동성이 더욱 커질 것이라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 미국과 우리나라를 비롯한 FATF 회원국에서는 비트코인을 거래하는 이들의 구체적인 거래정보를 규제당국이 모두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