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은 미국과 중국이 지난 10~11일 미국 워싱턴 DC에서 고위급 무역협상을 일단락짓는데도 중국에서 비롯된 돼지고기 파동이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본다. 이번 협상에서 미국은 오는 15일부터 연간 2500억 달러(약 296조5000억원) 규모의 중국산 제품에 대한 추가 관세를 25%에서 30%로 인상하려던 방침을 보류했다. 중국은 연간 400억~500억 달러어치의 미국산 농산물을 수입하기로 했다.
합의대로라면 중국의 미국 농산물 수입 규모는 2012년(연간 260억 달러어치) 정점에 비해 최대 90% 넘게 늘어나게 된다. 미국과 중국이 무역전쟁을 벌이기 전인 2017년만 해도 중국은 약 240억 달러어치의 미국산 농산물을 수입하는 데 그쳤다.
미국과 중국의 이번 '1단계 합의' 세부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국은 미국산 돼지고기와 대두(콩) 등의 수입을 대거 늘릴 전망이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이번에 중국 협상단을 이끈 류허 부총리를 통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전한 친서에서 미국산 대두와 돼지고기 수입 가속화를 강조했다고 미국 백악관이 11일 밝혔다.
중국이 미국산 돼지고기 수입에 열을 올리는 것은 ASF 여파로 물량이 워낙 달리기 때문이다. 중국은 세계 최대 돼지 사육국이자 돼지고기 소비국이다. 지난해 8월 아시아 국가로는 처음으로 중국에서 돼지열병이 발생한 뒤 전 세계 사육두수의 절반인 4억 마리가 넘던 돼지가 반토막 난 지 오래다(라보뱅크 9월 보고서). 미국 농업부는 지난 7월에 낸 보고서에서 중국의 올해 돼지고기 부족분이 1억8300만 마리에 이를 것으로 관측했다.
ASF는 치사율이 100%에 달하지만 예방백신이 없기 때문에 살처분 외에는 마땅한 대책이 없다. 지난해 8월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에서 처음 발병한 뒤 베트남, 몽골, 캄보디아, 라오스, 북한 등에 이어 최근 국내에서도 번지고 있다.
돼지고기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자, 중국 정부는 최근 '전략비축분'까지 방출하고 나섰지만 폭등하는 가격을 붙잡기엔 역부족이었다. 중국 내 돼지고기 도매가격은 지난 한 달 새 26% 올랐고, 소매가격은 84% 뛰었다. 뉴욕타임스(NYT)는 중국 내 돼지고기 파동이 국가적인 위기로 급격히 부상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리커창 중국 총리를 비롯한 중국 지도부가 드러내놓고 이를 경계하고 나섰을 정도라는 것이다.
문제는 단기간에 ASF를 둘러싼 상황의 호전을 기대하기 어렵고, 오히려 연쇄파장이 닥칠 공산이 크다는 점이다. 국제 축산가공업계에서는 중국발 풍선효과에 따른 세계적인 돼지고기 파동, 궁극적으로는 글로벌 단백질 파동이 일어날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다. 중국이 돼지고기 수입을 대거 늘리면 미국과 유럽 등 수출국에서도 가격이 뛸 수밖에 없고, 이는 한국과 일본을 비롯한 다른 시장에도 영향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또 돼지고기 가격이 급등하면 소고기와 닭고기 등 다른 육류 가격도 함께 오를 수밖에 없다고 전문가들은 우려한다.
국내 축산가공업계의 한 관계자는 "중국, 일본, 한국, 필리핀은 전 세계 돼지고기 수입량의 50%를 차지하는 만큼, 상황이 더 나빠지면 그만큼 피해가 커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전 세계에서 돼지고기 수출비중이 가장 큰 독일, 스페인, 미국 등지에서 ASF가 발병하면 통제하기 힘든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