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드러나는 거짓말과 위선, 언행불일치의 첨단을 달리는 그의 뻔뻔함에 국민의 실망과 울화가 비등점을 넘어선 지 오래인데, 정작 문재인 대통령은 "(사법개혁, 검찰개혁의 적임자를) 의혹만으로 임명하지 않는다면 나쁜 선례가 될 것”이라는 논리로 임명을 강행해 분노의 불길을 지폈다. 조 장관의 가족 일가를 둘러싼 각종 의혹에 대한 실체 규명은 검찰 몫이지만 ’조국 사태‘가 한국 사회에 몰고 온 충격은 일파만파로 확대재생산을 거듭하고 있다.
오죽하면 ‘기-승-전-조국’이란 유행어가 탄생했을까? 어딜 가나 ‘조국 사태’가 화제의 중심이 되면서 한국 사회를 날줄과 씨줄로 촘촘히 엮고 있는 크고 작은 모임과 공동체들이 파괴되거나 쪼개지는 중이다.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 동창회, 최고경영자과정 수료생 모임, 맘카페, 동호회 등 국민 각자가 가입한 SNS 단체방, 사이버 세상에선 ‘조국 사태’에 대한 반응을 기준으로 퇴출과 응집이 가속화되고 있다. 조국을 지지하면 개혁론자가 되지만 반대하면 수구꼴통으로 조리돌림을 당하게 되니, 허심탄회하게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주고받는 술자리도 셀프 사상검열을 하고 눈치 보며 말해야 하는 부담 있는 자리로 둔갑하고 말았다.
우리를 비판하는 세력은 악(惡)이고 우리편은 선(善)이라는 편 가르기와 적 만들기가 대통령의 특기이고, 상황에 따라 적의 명패가 바뀐다는 사실은 지난 2년여의 시간을 살아내면서 알게 되었다. 집권 초기 ‘적폐’ 대 ‘공정과 정의 실현’의 구도는 ‘외세의존’ 대 ‘자주(自主)파’를 거쳐 올해는 ‘친일’ 대 '반일(反日)', ‘토착왜구’ 대 ‘의병’으로 바뀌더니 ‘조국 사태’를 계기로 ‘수구꼴통’ 대 ‘개혁 지지’로 프레임이 바뀌었다. 나치시대의 독일법학자 칼 슈미트는 정치권력은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계속해서 ‘적 만들기(enemy-making)’를 통해 집단혐오를 부추긴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문 대통령은 주요 현안을 ‘좋은 일’과 ‘나쁜 일’로 나누고, 국제 관계를 ‘친구’와 ‘적’으로 양분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매우 닮았다.
하지만 재정부채만 늘린 소득주도성장, 수출길을 차단한 탈원전, 산림황폐화의 주범 태양광사업, 집값만 올려놓은 부동산정책, 무임승차자를 양산한 보편적 복지, 중국과 북한 눈치만 보는 외교 안보, 자사고 폐지를 통한 교육의 하향 평준화 둥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려운 수많은 정책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40%대를 유지하는 대통령의 지지율은 늘 수수께끼였다.
요즘 조국(曺國)덕분에 조국(祖國)을 구할 수 있게 돼 불행 중 다행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조국 사태’로 1987년 이후 한국 정치를 직·간접적으로 주물러온 386운동권 세력의 변질된 실체와 엔터테인먼트 업계로 둔갑해버린 한국 정치의 실상이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23일 자택 압수수색 사실이 보도되자 친문 네티즌들은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우리 집도 압수수색하라’는 의미의 ‘우리가 조국이다’라는 동일 검색어를 집단적으로 입력해 한때 실시간 검색어 최상단에 올랐다. 대통령이 그를 장관에 임명했을 때는 “조국 장관은 문프(문재인 대통령)가 2년 동안 쓰신 인재입니다. 무조건 믿으세요”나 “댓방(댓글방어)은 문파(문재인 팬)의 병역의무” 같은 글들이 수백번 공유됐다. 반면 검찰개혁의 최적임자라던 윤석열 검찰총장은 조 장관 일가의 혐의에 대한 수사에 착수하자 정치 검찰의 수괴로 낙인찍혔고, 청문회에서 여당의원으로는 유일하게 법무부 장관 임명을 반대한 금태섭 의원은 수만통의 비난 문자 폭탄을 받았다.
아이디 조작을 통한 실시간 검색어 올리기, 댓글 조작, 비판 보도를 가짜 뉴스로 낙인 찍기, 문자 폭탄 테러, 반대의견에 대한 글 삭제와 탈방 위협··· 급기야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을 훼손하기 위해 가짜 아이디를 만들어 서명하는 물타기 조작 서명도 동원됐다. 상황변화와 무관하게 여전히 높은 대통령의 지지율 뒤에는 아이돌 팬클럽이 활용해 온 각종 기법을 가져다 적용한 인터넷 여론 조작이 있었다. 정치 팬덤 현상으로 40%대 지지율 유지의 비밀을 설명할 수 있다.
팬덤의 사전적 의미는 특정한 인물이나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거나 몰입하여 그 속에 빠져드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대중적인 특정 인물이나 분야에 지나치게 편향된 사람들을 하나의 큰 틀로 묶은 개념이다. 요즘은 K-팝을 주도하는 아이돌그룹의 열성적인 팬과 팬들이 아이돌그룹을 위해 벌이는 각종 활동을 가리키는 용어로 많이 쓰이고 있다. 아이돌그룹의 팬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해 벌이는 모금 기부활동과 굿즈(기념 상품) 판매, SNS 홍보, 콘서트 입장권 판매를 아우르는 팬덤 경제의 규모는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특정 정치인에 대한 지지와 응원에서 시작된 정치 팬덤은 2000년대 초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에서 출발한다. 이후 박근혜 전 대통령의 ‘박근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박사모)’이 ‘친박연대’라는 정당으로 진화하면서 정치 팬덤은 특정 정치인에 대한 지지 표명을 넘어서, 선거나 정책 결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단계로 발전했다.
‘조국 사태’는 문 대통령과 조 장관을 메인 보컬로 내세운 그룹사운드 ‘386방탄중년단’이 결성되었고,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불사하는 ‘달빛팬클럽’이 맹활약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이 큰 정의를 위해서라면 윤리와 도덕·진실 같은 작은 정의는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으며, ‘옳고 그름’이 아니라 ‘내편 네편’이 판단 기준인 현재, 사회 각 분야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386운동권의 정서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이런 이름을 붙였다.
집권 초기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이 소매를 걷어붙인 와이셔츠 차림에 텀블러를 들고 웃으며 걷는 사진이 국민들에게 신선한 인상을 줬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전부였다. 국정을 실제로 수행하기보다는, 멋지게 국정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벤트와 쇼가 더욱 중요했다. 인기가 생명인 연예인에게는 멋진 이미지가 절대적이다. 하지만 외모 패권으로 무장한 ‘386방탄중년단’의 이미지 정치는 이제 본색이 드러나면서 ‘아우라’가 사라져 가고 있다.
아이돌 연예인을 좋아하듯 정치인을 좋아하고 응원할 수 있다. 하지만 정치팬덤이 특정 정치인을 맹목적으로 지지하고 '절대 선(善)'으로 추앙하는 컬트(cult)화(化)로 변질된다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대한민국의 미래와 국민 전체의 운명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정치를 정치 본연의 자리로 돌려놓을 때다. <논설고문·건국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