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유화 칼럼] 홍콩사태와 中 공산당 19기 4중전회

2019-09-10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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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유화 원장] 



60년 전, 1959년 7월 중국공산당 루산회의에서 한국전쟁의 총 사령관을 지냈던 펑더화이가 대약진 운동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간하다  마오쩌둥의 노여움을 사서 그의 지지자와 함께 실각되었다. 그 결과 대약진에 대한 당내 반대의견이 없어지는 동시에 더욱 무리한 경제목표가 부과되게 되었고, 그 할당량을 달성할 수 없었던 공산당 간부들은 부풀린 성과를 보고하면서 중국경제는 파탄에 이르게 된다. 결과적으로 3,000만명에 이르는 사상 최악의 아사자를 내고,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마오쩌둥은 국가주석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는 당의 권력과 영향력이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에게 넘어가려 하자 문화대혁명이라는 극좌적 사회주의 운동을 통해 재기를 꿈꾼다. 결과적으로 중국 경제뿐만 아니라 중국의 전통문화까지 송두리째 앗아간 문화대혁명은 1976년 마오쩌둥의 사망과 4인방의 체포로 종식되었고,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11기 3중전회가 1978년에 열린다. 이 회의에서 덩샤오핑 중심의 새 지도부가 확립되고 중국은 개혁개방의 길로 나가게 된다.
여기서 잠깐 중국공산당의 ‘중전회’에 대해 알아보자. 헌법상 중국의 최고권력기구는 1년에 한번씩 열리는 한국의 국회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이지만 중국공산당은 이에 대한 영도조직으로 규정되어 있기에 실질적인 최고권력기관이다. 5년마다 한번씩 열리는 중국공산당 전국대표대회에서는 약 2280명의 대표가 미래 중국의 발전을 위한 정치.경제.사회 등 각 분야의 굵직한 결정을 한다. 그런데 당대회는 5년에 한번씩 열리다 보니 그 사이사이 당과 국가의 중요한 결정을 할 기구가 필요한데, 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이며, 중국공산당의 실질적인 최고결정기구이다. 현재 제19기는 중앙위원 204명, 후보위원 172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앙위원들 전체가 모여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를 하며 줄여서 ‘중전회’라고 한다. ‘중전회’는 매년 적어도 1차례 개최하는 것이 원칙이다. 당대회가 열린 직전과 직후에는 여러 가지 결정할 일들이 많기 때문에 1년에 여러 차례 열린다. 일반적으로 ‘제1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 약칭으로 ‘1중전회’으로 하며 일반적으로 중국공산당의 지도부 인선을 수행하며, ‘2중전회’는 정부기관 구성과 개편, 인사방안을 주로 논의하고 결정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3중전회’는 경제와 관련된 중요한 모든 정책방향을 결정한다. '1중전회'와 '2중전회'는 각각 당대회와 양회라는 큰 정치 행사의 부속물처럼 여겨지고 있는데, '1중전회'는 당대회의 뒷설거지, '2중전회'는 양회의 밥상 차리기 개념의 작업이라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3중전회'는 독립적으로 열리는데다 새로운 정권 구성 이후 앞으로 10년 동안 중국 경제,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기능을 맡고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개최된 '3중전회'의 결정의안을 통해서 중국이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1978년 열린 11기 3중전회는 현재 중국의 모습을 결정한, 중국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기점의 하나이다. 이 회의에서 덩샤오핑이 중국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면서 '개혁, 개방'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6년 이후 1984년 12기 3중전회는 중국식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경제개혁을 농촌에서 도시로 확대시켰고, 9년 이후 1993년 14기 3중전회는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공식화하고 국유기업의 개념을 도입하였으며, 10년 이후 2003년 16기 3중전회에서는 헌법상 사유재산을 공식화하였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정치국은 지난 8월 30일에 회의를 열고 올해 10월 베이징에서 중국공산당 제19기 4중전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그럼 중국공산당 4중전회는 어떤 회의인가? 우선 역대 4중전회의 주제를 보면 다양하며, 경제, 당내 건설 등 주요 의제를 다룬다. 경제 문제는 과거 여러차례 다루어졌다. 예를 들어, 1979년의 11기 4중 전회에서 개혁을 통한 농업 발전 문제를 주로 논의하였으며, 1985년 12차 4중전회에서는 7차 5개년 계획의 초안이 논의되었다. 또한 중요한 당내 조직규범인 중앙지도기구의 세대교체 원칙도 확실하게 하면서 예짼잉 등 과거 마오쩌둥과 혁명을 함께 했던 원로 64명이 중앙위원회에서 퇴출되었다. 또 1999년 13기 4중전회에는 '공기업 개혁과 발전에 관한 중공중앙의 중대한 문제 결정'을 심의해 통과시켜 국유기업 개혁의 서막을 열었다. 그 이후 열린 14기, 16기, 17기의 4중전회는 주로 당의 집권과 당 건설 문제가 논의되었다. 예컨대 16기 4중전회에서 인민을 위한 집권, 공공이익에 기반한 당 건설, 과학집권, 민주집권, 의법치국 등의 표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을 것이다. 18기 4중전회에서는, 의법치국(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주제로 한 역사상의 첫 번째 회의이다. 지난 3중전회에서 확립한 전면적인 개혁심화에 대한 정책을 결정한 이후 ‘법치중국’을 위한 더욱 구체적인 정책을 도입한 것이다. 이는 헌법의 권위를 지키고 행정법 집행체제개혁을 심화하고, 재판권과 검찰권을 더 독립적이고 공정하게 만드는 등 사회적 이슈를 포함하고 있다. 이번 10월에 개최예정인 19기 4중전회 주요주제는 중국공산당 정치국 업무보고와 중국특색 사회주의제도 유지와 완비화를 위한 연구토론 및 국가통치시스템과 거버넌스 역량의 현대화를 추진하기 위한 몇 가지 중대한 문제를 논의한다고 발표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30년 전인 1989년 6월에 개최된 제13기 4중전회 당시 시대적 배경과 지금 중국이 당면한 문제들이 많이 비슷하다는 사실이다. 당시 4중전회에서 천안문광장에서의 학생운동에 대해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했던 자오지양 (Zhao Ziyang) 총서기에 대해 당과 국가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순간에 불안을 조장하고 당을 분열시키는 명백한 실수를 저질렀다고 규명하고 그 책임을 물어 당총서기직에서 강제 물러나게 하고 장쩌민을 그 후임자로 선출하였다. 현재 연속 13주 넘게 이어져온 홍콩시위는 케리람 홍콩장관이 범죄인의 중국본토 송환법 취소를 약속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가열화되고 있다. 이는 89년 6월 천안문사태 당시 배경과 너무 비슷하다. 당시 시위학생들의 요구사항은 민주주의 도입이었다. 이번 홍콩시위대의 5가지 요구 사항 중에서 2가지가 가장 핵심인데 바로 범죄인의 중국본토송환법 반대에 이어 의원과 행정장관에 대한 직선제이다. 즉 일국양제하에서 홍콩에서만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보장해 달라는 의미이다. 이에 대해 홍콩정부는 명확한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에 시진핑지도부는 이번 4중전회에서 당의 중국 전반 사회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고 그 실효성 제고를 위한 수단들도 현대화 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특히 최근 중앙당교 개학식 연설에서 시 주석은 중국공산당과 중국인민은 앞으로 2개의 100년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대내외 모든 저항세력과 확실한 투쟁을 이어나감으로써 부강한 중국을 실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미국과의 장기전 투쟁을 포함하는 개념이기도 하지만 날로 동요하는 중국 기업가들과 중국 기득권내 존재하는 모순에 대해서도 투쟁할 의지가 있음을 말한다. 사회가 안정되고 문제가 적으면 통치자는 일반적으로 ‘투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15분 연설에서 시 주석은 58번의 ‘투쟁’을 언급하고 공무원과 공산당 간부는 투쟁을 잘하는 전사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이번 10월에 개최될 19기 4중전회의 주요내용은 바로 조화롭고 단결된 사회를 강조하고, 미래 중국사회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안정적인 통치를 이어가고 강화할 수단과 방법 및 그 방향에 대해 중심적으로 논의될 것으로 예상된다.

89년 학생운동 당시 해외언론의 비난으로 중국경제는 큰 타격을 입는다. 당시 이런 국면을 만회하고자 덩샤오핑은 홍콩 거부 리카싱을 내세워 화교중심의 외상투자를 대대적으로 유치하고 개혁개방속도를 더욱 가속화하면서 ‘92년 사회주의 시장경제 실시를 헌법에 명확하게 규명함으로써 동요하는 민영기업가들의 불안을 잠재웠다. 오늘 날 중국의 민영기업들은 굉장히 혼란스러워하고 홍콩사태는 왕년의 학생운동사태와 너무 닮아있다. 그리고 현재 중국 내 외상투자기업의 해외탈출 사태 역시 당시와 너무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시진핑 정부의 대안 역시 덩샤오핑의 당시 대처방안과 비슷한데 개혁개방을 더욱 확대하는 것이다. 이번 홍콩사태로 중국정부는 선전 및 기타 18개 도시를 자유무역도시로 지정하고, 이중 선전은 글로벌 최고 도시로 육성한다는 계획이다. 또한 금융시장의 개혁개방을 확대하여 증권분야  개방도 2020년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당시 덩샤오핑이 개혁개방확대로 위기를 극복한 것처럼 오늘날 시진핑 역시 개혁개방확대로 현재의 난관을 돌파하고자 하는 것이다. 

시진핑의 3기 체제가 가능한지는 앞으로 2년 동안 중국경제의 안정화와  홍콩사태 등 국내외 정치환경에  달려있다. 미국 의회는 <홍콩 인권과 민주화>에 관한 법을 제정하려고 시도하고 있으며, 이를 중.미 무역전쟁의 하나의 카드로 활용하려고 한다. 홍콩은 중국으로 1997년 회귀한 뒤 안정적인 발전을 이룩했지만 현재 중대한 갈림길에 서있다. 확실한 것은 중국 본토에서 선전.상하이를 포함한 그 어떤 도시도 오늘날 홍콩의 글로벌 금융시장에서의 역할과 위치를 대체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따라서 홍콩의 안정화는 시진핑의 3기와 중국의 글로벌 체제 위치 확보와 발전에 아주 중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4중전회는 시 주석에게는 당내권력 주도권 확보와 미래 안정적 정치기반 마련을 위한 아주 중대한 권력투쟁의 장이 될 것이다.

(중국증권행정연구원 안유화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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