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행정부의 취임 미국의 재정적자가 급증하고 있다. 미국 의회예산국(CBO)은 이런 추세가 지속된다면 미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가 2018년 77.8%에서 2029년 91.8%까지 상승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유럽통화동맹(EMU)에서는 이 비율이 60% 이상인 회원국에 대해서는 벌칙을 부과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보다 낮은 40%를 심리적 마지노선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런데 왜 미국에서는 80%에 근접해도 재정위기에 대한 우려가 없을까?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거시경제지표가 전반적으로 양호하다는데 있다. 중국과 무역전쟁의 여파로 올 1/4 분기부터 기업의 고정투자, 주택 투자와 제조업 생산량 감소를 제외한다면, 미국의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심각한 문제는 거의 없다. 2009년 6월에서 이번 달까지 미국 경제는 121개월째 성장하였다. 이 기록은 1854년 통계가 처음 집계된 이후 가장 긴 것이다. 이 기간 동안 연평균 성장률은 2.3%, GDP는 25% 증가하였다. 실업률도 완전고용에 근접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지난 5월 실업률 3.6%는 1969년 12월 3.5%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여기에 물가 상승도 목표로 하는 2% 이내에서 잘 관리되고 있다.
반면 비주류 경제학자들이 발전시킨 현대통화이론(Modern Monetary Theory: MMT)에 따르면, 미국이 주권국가로서 독자적으로 화폐를 발행하는 한 재정적자 문제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필요할 경우는 언제나 정부가 중앙은행의 발권을 통해 재정적자를 보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언뜻 보기에 이 주장은 명확한 근거가 없는 무책임하게 보인다. 그러나 금융시장은 물론 학계에서도 점점 더 큰 주목을 받고 있는 MMT를 주술, 극단적 발상, 또는 공짜점심이라고 간단히 폄하해 버릴 수는 없다.
MMT는 국민경제를 대차대조표― 민간(저축-투자)+정부(조세-정부구매)+해외(수입-수입)=0 ―를 통해 분석한다. 이 분석에서 해외 부문을 제외하면 정부의 지출은 민간의 소득과 일치한다. 즉 정부의 적자는 민간의 흑자를 의미한다. 이런 측면에서 부채와 자산은 특정 시점에서의 재산 상태를 보여주는 지표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 분석에서 중요한 것은 부채와 자산의 구분이 아니라 대차대조표의 규모이다. 정부의 대차대조표에서 부채가 증가하더라도 민간의 대차대조표에서 자산이 증가되어 소비가 촉진되면, 국민경제의 대차대조표 규모가 커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석 방법은 민간이 부채를 줄이는데 집중함으로써 발생하는 대차대조표 불황을 설명하는데 활용된 바 있다. 1990년대 일본에서 거품 경제의 붕괴로 자산 가격이 폭락할 때, 민간 부문은 대차대조표에서 부채를 줄이기 위해 지출을 축소하였다. 민간의 지출 감소는 총수요의 하락으로 이어져 국민경제의 대차대조표 규모를 줄였다. 이러한 악순환을 극복하기 위해서 일본정부는 중앙은행을 통해 민간의 자산을 증가시키기 위한 양적완화정책을 추진했던 것이다.
MMT는 양적 완화 이후 물가안정도 설득력이 있는 분석을 제공하였다. 금융경색과 경기침체를 막기 위해 막대한 구제금융을 금융권에 제공한 결과 중앙은행의 GDP 대비 자산이 2007-16년 사이 연방준비제도는 18%, 일본은행은 55%, 영란은행은 22%, 유럽중앙은행(ECB) 18% 증가하였다. 주류 거시경제이론에 따르면 통화량 증가는 물가 상승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양적완화를 실시한 모든 국가에서 물가상승률은 2% 이하였다. 급속한 물가 상승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중앙은행의 채권 구매가 중앙은행의 대차대조표 상에서 저축계정에서 결제계정으로 이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MMT를 비판하는 주류 거시경제학들 중에서도 MMT와 유사한 정책을 제안하고 있다. 올리버 블랑차드 전 국제통화기금(IMF) 수석경제학자는 올해 1월 미국경제학회에서 금리를 더 이상 낮출 수 없는 초저금리 상황에서는 경기부양은 통화정책이 아니라 재정정책에게 달려있다고 지적하였다. 래리 서머스 전 재무장과 제이슨 퍼만 전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장도 잠재성장률이 상승하지 않는 구조적 장기침체를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는 투자(인프라, 교육 및 의료)를 위해서는 재정적자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재정정책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국가부채가 GDP 대비 40%를 넘어설 정도로 확장적인 재정정책은 위험하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재정수지가 2009년을 제외하고 계속 흑자였기 때문에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추진할 능력이 충분하다는 반론도 있다. 경제정책의 궁극적 목표가 균형재정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성장이라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향후 논쟁은 재정정책의 필요성과 가능성이 아니라 재정정책의 구체적 수단과 효과에 집중해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미중 무역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줄이고 장기적으로는 성장 잠재력을 강화하는데 필요한 데 사용되기만 한다면, 재정적자는 충분히 감수할 만한가치가 있다. MMT가 아닌 주류 거시경제학을 따르는 IMF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적극적인 재정정책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조언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긴축정책의 정치적 결과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세계금융위기 이후 강력한 긴축정책을 추진한 영국에서 브렉시트가 발생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