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96책 국보 추가 지정

2019-06-25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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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사리공예품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도 함께 지정

[문화재청 ]

조선왕조실록 96책이 국보로 추가 지정됐다.

문화재청은 조선왕조실록 정족산사고본의 누락본 7책, 적상산사고본 4책과 오대산사고본 1책, 봉모당(창덕궁 후원에 세워진 규장각 부속 건물 중 하나)본 6책, 낙질 및 산엽본(완전한 모습을 갖추지 못한 책) 78책 등 ‘조선왕조실록’ 96책을 확인해 국보로 추가 지정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리기인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를 국보로 지정했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시대의 정치‧사회‧외교‧경제‧군사‧법률‧문화 등 각 방면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으로, 국왕도 마음대로 열람하지 못했을 정도로 진실성과 신빙성이 높은 사료다. 1973년 국보 제151호로 지정됐고 이후 국제적으로도 가치를 인정받아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이번 추가 지정은 2016년 문화재청이 국보 제151-1호인 ‘조선왕조실록 정족산사고본’의 일부가 1973년 국보로 지정될 당시부터 누락됐다는 사실을 안 후 2017년부터 2018년까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을 포함해 기타 소재지를 파악해 일괄 조사한 결과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85책/정족산사고본 7책, 낙질‧산엽본 78책)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9책), 국립중앙박물관(1책), 국립고궁박물관(1책)에 소장된 실록을 추가로 확인했다. 이 중에는 1973년 국보 지정 때 누락됐던 것과 국보 지정 이후 환수됐거나 별도로 구매한 것이 포함돼 있다.

국보 제151-1호에서 누락된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성종실록’ 7책은 정족산사고본인 제151-1호에 편입됐고 지난해 일본에서 환수된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효종실록’ 1책은 국보 제151-3호 오대산사고본에 편입됐다.

6.25전쟁 때 북한군이 북으로 반출해 국내에 없는 것으로 알려졌던 적상산사고본 실록(4책)은 국립중앙박물관(1책)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3책)에 나눠서 보관돼 온 사실을 파악하고 추가 지정한 것은 대표적인 성과로 꼽을 수 있다. 국보 제151-4호 조선왕조실록 적상산사고본의 지정을 계기로, 완질 또는 일부 형태로라도 국내에 전해진 조선 4대 사고인 정족산‧오대산‧적상산‧태백산사고 실록의 현황을 모두 파악하게 됐고 북한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머지 적상산사고본 실록의 연구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문화재청은 기대하고 있다.

국보 제151-5호 조선왕조실록 봉모당본은 첫 면에 ‘봉모당인’이라는 소장인이 찍혀 있고 푸른색 비단으로 장정한 어람용 실록으로, 주로 역대 국왕과 왕비들의 생애와 행적을 기록한 일대기다. 조선 후기에 어람용 실록을 특별히 제작한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자, 조정에서 논의된 국정 관련 사안에 대해서는 객관성 유지를 위해 끝까지 왕에게 보이지 않은 사관들의 철저하고 일관된 태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사례라고 문화재청은 설명했다.

국보 제151-6호 조선왕조실록 낙질 및 산엽본은 정족산사고본, 태백산사고본, 오대산사고본 등에 속하지 않는 낙질 성격의 또 다른 실록 67책과 기타 산엽본 11책 등 총 78책이다. 낙질본은 원래 사고에서 제외된 중간본 실록이 다수이고, 산엽본은 정족산사고본 실록의 낙장을 모아놓은 것이다. ‘낙질 및 산엽본’은 재해로 인해 훼손되었거나 일부를 오리거나 붙여서 수정한 흔적이 많지만 ‘후세에 전할 역사의 증거’라는 인식에 따라 잔편이라도 소중히 보존해야 한다는 시대정신과 실록 편찬 상황을 생생하게 담고 있는 근거 자료로서 의의가 크다고 문화재청은 밝혔다.

이번에 지정된 조선왕조실록은 갑작스러운 재난에 대비해 여러 사고에 나누어 보관한 체제와 수정과 개수 등 실록 간행의 종합적인 실상을 알려주고 선조들의 철저한 기록관리 정신을 다시 한 번 증명해주는 문화유산으로 유무형의 진실성과 신빙성은 한 나라의 역사를 넘어 인류문화사적으로도 탁월해 이러한 이유로 국보 제151호에 추가해 지정하기에 충분하다고 문화재청은 덧붙였다.

국보 제327호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는 2007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백제 왕실 사찰인 왕흥사터의 목탑지에서 발굴한 유물로,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알려진 사리기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출토 당시 금당(대웅전) 앞 목탑지의 사리공(사리기를 넣은 네모난 구멍)에서 진흙 속에 잠긴 채 발견됐고, 이후 보존처리를 통해 지금의 찬란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리기는 겉에서부터 순서대로 청동제사리합-은제사리호-금제사리병 순의 3가지 용기로 구성돼 있고, 청동제사리합 겉면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577년(위덕왕 24년)에 만들어진 사실이 확인됐다. 명문에 의하면 이 사리기는 백제 위덕왕이 죽은 왕자의 명복을 빌고자 발원한 왕실 공예품이다. 제작 시기가 명확한 사리기로, 연대가 가장 빠르다.

6세기 전반 사리공예품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부여 왕흥사지 출토 사리기’는 백제 왕실 공예품이라는 역사적․예술적 가치,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절대 연대를 가진 작품이라는 희소성과 뛰어난 작품성으로 우리나라 공예와 조형 예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높은 작품이라고 문화재청은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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