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회는 앵벌이 하지 말고 국가정체성의 중심 돼야”
“박정희가 위대해 경제발전한 게 아니라 교육열이 유달리 높았기 때문"
"일제가 하나님의 뜻이면 독립운동가는 하나님 뜻 거스른 사람들"
김 회장은 국회에서 3선 의원을 지내는 동안 주로 외교통상통일위원회에서 있었다. 후원금 모금에 도움이 되지 않는 비인기 상임위다. 외교통일 공부에는 보탬이 됐을 것이다.
-세계 판도가 미중 대결 구도로 전개되고 있다. 미국이 중국 팽창주의를 견제하기 위해 한일 협력관계를 바란다. 한일 과거사가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안보나 외교에 장애가 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나. 미래와 과거는 분리해야 하지 않겠나.
-정치 경력을 살펴보면 꼬마민주당으로 시작해서 이회창 총재 때 한나라당 입당했다가 탈당하지 않았나. 그러다가 열린우리당에 참여했는데…. 정치 이력에 대해 설명해 달라.
“원래 꼬마민주당 대표는 이기택이었다. 이부영 노무현 이철 박석무 유인태 원혜영과 나 같은 개혁 세력은 비주류였다. 당권은 이기택이 갖고 있었다. 개혁세력이 3김 지역주의 청산을 외쳤다가 다 떨어졌다. 비례대표는 전부 이기택이 장악했다. 우리가 하로동선(夏爐冬煽) 이라는 식당을 하는 동안에 대선이 임박해 꼬마민주당과 신한국당이 통합했다. 당대당 통합으로 한나라당이 된 거다. 이부영 제정구 김부겸 이미경 김홍신 등이 그렇게 한나라당이 됐다. 당을 옮기거나 탈당한 게 아니다.
대선 앞두고 이회창이 여론조사에서 1등이고 2등이 정몽준이었을 때였다. 노무현이 3등이었다. 김근태가 찾아와 이회창의 집권을 막기 위해 차선책으로 정몽준을 밀어주자고 하더라. ‘난 김근태 의원과 입장이 다르다 .노무현이랑 지역주의 청산을 위해 앞장서다 낙선도 했고 식당도 동업했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노무현을 배반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개혁국민정당 만들 때 김부겸 김홍신 이부영 다 만나서 상의했다. 아무도 한나라당에서 안 나간다는 거다. 노무현이 꼴찌할 때니까. 난 그때 ‘이회창을 도울 수 없다. 국회의원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나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유시민과 개혁당을 만들어 대표를 맡았다.”
-어쩌다 강원도에서 약초 농사를 시작하게 됐나.
“하로동선 식당을 했던 게 1997년부터 2000년까지다. 우리가 3김 지역주의 청산하자고 했다가 노무현이 낙선하고 나는 충청도라 김종필 바람에 떨어졌다. 이철 유인태 원혜영 박계동 등까지 다 나가떨어졌다. 3김과 지역주의 청산을 내세웠는데 선거가 끝나니 우리가 청산된 거다. 그 때에 많은 사람들이 ‘너희들이 떨어졌지만 소중한 정치적 자원’이라고 했다. 우리가 함께 하는 방법으로 돈 2000만원씩 내서 식당을 냈다. 하로동선, 여름 하, 화로 로, 겨울 동, 부채 선, 당장은 필요 없는 거 같지만 ‘때를 만나면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중국 고사에서 따왔다.
1년 반쯤 식당을 운영하다 다음 선거에 어떻게 할지 상의하는데 노무현은 YS를 끝까지 안 따라간다더라. 제정구도 DJ를 안 따라간다더라. 나도 ‘JP를 못 따라가겠다. 정치적 색깔이 틀려서…’ 그랬다. 그러면 다음에 또 떨어질 가능성 높지 않았겠나. 그래서 시골에 파묻혀 농사나 짓자고 했다.
3김 지역주의의 영향이 없는 오지에 땅을 사자고 해서 강원도로 오게 됐다. 부동산을 하는 제정구 후배의 소개로 산 넘고 산 넘어 갔더니 내린천 흐르는 옆에 농가가 하나 있더라. 슬레이트를 올린 집이었지만 경관이 좋았다. 10분 만에 계약을 했다. 주인에게 2년 반 후에 올 테니 그때까지 살라고 했다. 우리는 떨어지면 오려고 했는데 노무현이 종로로 옮겨서 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되는 바람에 못 갔지. 그 사이에 제정구는 암으로 죽었다. 노무현은 대통령 마치고 부엉이 바위에서 그렇게 됐다. 그리고 우리당 국회의원 명단을 보니까 백 몇십 명 중에 내 나이가 3번짼가 4번짼가 그렇더라. 정권도 빼앗겼다. 그래서 정리하고 그 땅에 들어간 거다.
-광복회를 어떻게 끌고 나갈 참인가.
“내가 생각하는 통일은 ‘항일운동을 했던 남과 북의 양심세력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광복회가 무너진 양심을 복원하는 일에 앞장서고 싶다. 광복회가 우리나라 최고의 원로단체로서 국가 정체성의 중심에 서야 된다. 3·1절이나 8·15 같은 날이 오면 언론은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이 못사는 것만 조명한다. 광복회가 앵벌이를 하면 안 된다. 국가 정통성의 상징으로 존경받아야 한다. ‘불쌍하다, 3대가 망했다’ 이런 얘기만 들으면 어떻게 하나. 그건 국가의 불행이다. 나는 단재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을 13년 맡았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고 건국절 논란, 교학사 교과서, 이런 게 터져나왔다. 야당인 민주당이 제대로 대응을 못했다. 내가 항일독립운동가단체연합회(항단연)라는 걸 만들어 회장을 할 때였다. 교학사 교과서 논란 당시 내가 시민세력을 항단연의 이름으로 모아 대응했다. 시민단체들과 함께 법원에 교학사 교과서 배포 중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가처분이 받아들여지니까 박근혜 정부가 어쩔 수 없이 역사교과서 국정화로 간 거다.”
시대의 흐름을 거스른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좌초됐다.
“그때 시민사회세력들과 회의를 하다가 광복회에 연락해봤더니 ‘교과서가 나와봐야 안다’는 거다. 교과서의 내용이 신문에 이미 소개됐는데, 광복회는 미온적이었다. ‘일제의 조선지배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국무총리 후보자였던 문창극 씨가 얘기한 적이 있다. 그건 문 씨가 만든 말이 아니다. 일제시대 기독교 주류 세력이 그랬다. 일제 강점기 때 신사참배 하는 주류가 주장하는 논리가 이어진 거다. 친일청산을 안 하니까 그게 해방 이후에도 주류가 된 거다. 문 씨 말대로라면 독립운동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게 되지 않나. 광복회장이 되면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라고 말하겠다고 회원들에게 약속했다.”
-인생 좌우명을 소개해달라.
“아버지가 독립운동하고 어려움을 겪으셔서 제가 정치하는 걸 반대했다. 대학도 사범대학에 가라고 했다. 그래서 ‘교사직은 제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말씀 드렸더니 했더니 농대를 가라고 하시더라. 내가 우겨서 정치를 했다. 3당이 통합될 때 야합하지 않았던 노무현 이철 제정구 이부영 유인태 원혜영 등이랑 꼬마민주당을 창당했다. 고향에 가서 조그맣게 꼬마민주당 지구당 사무실을 냈다. 아버지가 그 때 무사즉강(無私卽强)이라는 좌우명을 하나 주셨다, ‘사사로움이 없어야 강해진다’는 뜻이다. 정치하면서 많은 유혹이 있었다. 무사즉강이란 좌우명을 생각하며 돈의 유혹을 철저하게 경계했다. 그러니까 어디 가서 얘기할 때도 자신감이 생겼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 허준 약초학교 하는데 계좌추적을 당하기도 했다. 촛불시위 2~3년 전부터 시민단체에 강연하러 다닌 게 그쪽의 미움을 받은 것 같다. 어려울 때마다 무사즉강이 떠올랐다.”
인터뷰를 하다 보니 정오를 넘겨 광복회 인근 베트남 쌀국수 집 ‘하롱베이의 하루’에서 점심을 같이 먹고 헤어졌다. 인터뷰에 함께 가 열심히 노트북 자판을 두들기는 김도형 정치부 기자가 고등학생 때 매월 당비 1만원씩을 내던 개혁당원이라고 하자 이 회장은 “내 팬들 중엔 개혁당 출신이 많다”며 반색을 했다. 김 회장은 7일 오전 11시 백범기념관 컨벤션 홀에서 광복회원과 각계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취임식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