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경 구속 기각 판사, 장문 사유서 왜 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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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길 부장판사 600자 장문 기각사유 속사정…“피의자, 고의나 위법성 인식 다소 희박”

판사 기각 사유, 증거 유무보다 관점이 대부분···긴 설명 불가피

서울동부지법 영장담담 박정길 부장판사는 3월 26일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에게 청구된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그 사유를 600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설명했다.

박 부장판사는 김 전 장관이 전(前) 정권 때 임명된 환경부 산하기관 임원에게 사퇴를 종용했다는 혐의에 대해 “새 정부가 해당 공공기관 운영을 정상화하기 위해 인사 수요 파악 등을 목적으로 사직 의사를 확인했다고 볼 여지가 있다”고 했다.

표적감사 혐의에 대해선 “최순실 일파의 국정 농단과 당시 대통령 탄핵으로 공공기관 인사와 감찰권이 적절하게 행사되지 못해 방만한 운영·기강 해이가 문제 됐던 사정이 있다”고 했다.

채용 비리 혐의에 대해서는 “청와대와 관련 부처 공무원이 후보자를 협의하거나 내정하던 관행이 장시간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면서 “피의자에게 고의나 위법성 인식이 다소 희박해 보이는 사정이 있다”고 했다.

구속영장 기각 사유가 이렇게 길고 자세한 경우는 드물다. 대개 “구속의 상당성에 의심이 가고 피의자의 방어권 행사를 보장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 정도가 고작이다. 그래서 박 판사가 왜 이렇게 길고 자세히 기각 사유를 설명했는지가 관심을 끈다.

사람 마음속의 일을 당사자가 아닌 이상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미국 법학자들이 내놓은 ‘판사의 마음속 결정 과정 연구’ 결과를 적용하면 박 판사가 왜 그랬는지 유추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김낭기 아주경제 로앤피 고문. [남궁진웅 기자, timeid@ajunews.com]

판사 마음속 결정과정 두 모델, ‘증거중심’과 ‘관점중심’

이 연구 결과는 판사의 마음속 결정 과정을 두 가지 모델로 설명한다. ‘위로부터의’ 모델과 ‘아래로부터의’ 모델이다.

‘위로부터’는 ‘관점 중심의 연역적 모델’이다. 관점이란 판사의 타고난 기질, 세상을 보는 눈, 이념, 가치관 등을 통틀어 말한다. 이런 요인들이 사실과 증거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렌즈가 돼 판사의 마음속 결정을 지배한다는 것이다. 단순화해서 말하면 결론을 대강 정해 놓고 여기에 맞춰 증거와 논리를 취사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아래로부터’는 ‘증거 중심의 귀납적 모델’이다. 눈앞에 있는 정보·사실·증거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자세히 음미한 뒤 이에 기초해 결론을 내린다. ‘위로부터’ 모델에 비해 관점이 결론에 미치는 영향이 훨씬 덜하다.

이상의 두 모델은 말 그대로 모델일 뿐이다. 판사들의 마음속 결정 과정이 모두 두 가지 중 하나로 무 자르듯 나눠진다는 말이 아니다. 실제로는 두 모델이 마음속에서 상호 작용하면서 판사에 따라, 그리고 같은 판사라도 사건에 따라 어느 한 모델이 상대적으로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그러면 판사들이 어떤 경우에 위로부터의 모델에 더 지배되고, 어떤 경우에 아래로부터의 모텔에 더 지배될까? 이 연구 결과에 따르면 판사가 어떤 동기에 더 좌우되는 사람이냐에 달려 있다. 그 동기는 두 가지로 설명된다. ‘정확성 동기’와 ‘방향성 동기’이다.

정확성 동기는 증거에 기초한 정확한 판결을 하려는 동기를 말한다. 방향성 동기는 판결을 통해 세상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려는 동기이다. 정확성 동기가 더 강한 판사는 아래로부터의 모델, 방향성 동기가 더 강한 판사는 위로부터의 모델에 더 좌우된다는 게 연구 결과이다.

김 전 장관 불구속 결정을 내린 박 부장판사에겐 과연 어떤 동기가 더 크게 작용했을까? 기각 사유를 보면 유추할 수 있다. 기각 사유는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있느냐 없느냐보다 사퇴 종용이나 표적감사, 특혜 채용을 어떤 관점에서 보고 어떻게 평가해야 하느냐 하는 내용으로 돼 있다.

판사 기각 사유, 증거 유무보다 관점이 대부분···긴 설명 불가피

박 부장판사는 전 정권 인사들에 대한 사퇴 종용은 공공기관 정상화를 위한 것으로, 표적감사는 최순실 국정농단 등으로 풀어진 공공기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것으로 봤다. 또 채용 비리는 예전부터 청와대와 관련 부처 공무원들이 공공기관 임원 후보자를 내정해온 관행에 따른 것으로 봤다.

이런 판단을 종합하면, 박 부장판사가 밝힌 기각 사유는 ‘현 정부가 전 정권 때 임명된 공공기관 임원들을 물갈이하고 강압적 수단을 쓴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 문제 삼기 어렵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세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나아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판사의 가치관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박 부장판사가 기각 결정을 내린 데는 정확성 동기보다 방향성 동기가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그 결과 증거 중심의 ‘아래로부터’가 아닌 관점 중심의 ‘위로부터’의 모델에 따라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정확성 동기라면 혐의를 소명할 증거가 있느냐 없느냐만 설명하면 되기에 기각 사유가 길어야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방향성 동기라면 왜 그 방향이 맞는지를 설명해야 해 긴 설명이 필요하다. 박 부장판사가 600자 장문의 기각 사유를 내놓은 이유를 이런 측면에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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