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이 가습기 살균제를 선택했다는 극심한 죄책감에 시달리며 자기 파괴적인 성향도 보였다.
가습기살균제사건과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는 14일 서울 중구 특조위 건물에서 가습기 살균제 참사 피해가정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가습기 참사 이후 피해가구를 직접 방문해 심층 조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 결과 성인 피해자의 약 66%가 지속되는 만성적 울분 상태를 보였다. 이 가운데 절반은 중증도 이상의 심각한 울분을 호소했다.
심각한 울분을 겪는 집단은 비교집단에 비해 자살 생각, 자살 시도를 비롯한 심리·정신 건강 변수에서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를 보였다.
이번 조사에 참여한 유명순 서울대 보건대학원 보건정책관리학 교수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는 정부가 정한 단계에 따르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진행 중이며 생애주기에 따라 심화, 누적되고 있다"며 "피해는 신체뿐만 아니라 인간 삶과 건강 전반에 걸쳐있다"고 설명했다.
유 교수는 "이런 사회 심리적 문제는 적절한 법과 제도, 정책 미비 때문에 간과돼왔고 이 때문에 심각한 울분과 각종 2차 피해를 유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피해자는 무고하다. 누구든 가습기 살균제를 살 수 있었다"며 "내가 살균제를 샀기 때문에 가족들이 피해를 봤다는 이유로 많은 이들이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성(性) 역할에 따른 피해의 중첩도 문제로 지적됐다.
유 교수는 "생활화학 제품을 구매하는 대다수는 여성으로, 여성들은 본인이 피해자이면서도 자신의 아이와 가족을 아프게 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며 "'네가 아이를 죽게 했다'는 주변의 지탄 또한, 여성들에게 큰 상처가 된다"고 말했다.
또 "한 여성은 아이를 안고 뛰어내렸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남의 일이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며 "여성은 아프면서도 아이들 앞에서는 씩씩해야 하는 역할 갈등까지 겪는다"고 부연했다.
가습기 피해자 이 모 씨는 "가습기 살균제 때문에 나와 내 아이가 피해를 봤다"며 "피해자이면서도 피해 입증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10년을 버텨왔다. 앞으로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할 것이고, 아이는 피해를 증명하기 위해 대를 이어 싸워야 한다"고 말했다.
연구책임자인 김동현 한림대 의대 사회의학교실 교수는 "6·25 사변 이래 환경적 유해요인에 의해 이 정도의 피해가 있었나 싶다"며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자의 사회적 고립과 정서적 상처가 생애사적 트라우마로 남을 수 있는 만큼 피해자에 대한 낙인을 극복하기 위한 정책 마련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