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4월 30일, 월맹(북베트남)군 탱크가 철문을 부수고 월남(남베트남) 대통령궁으로 진입하면서 베트남전은 마침내 막을 내린다. ‘사이공 함락(Fall of Saigon)'과 베트남의 공산화 통일은 미국인들에게 가장 잊고 싶은 악몽이다. 미국 대사관 옥상에서 마지막으로 출발하는 헬기를 타려고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남베트남 주민들. 이들을 마구 끌어내리는 미 해병대. 광기어린 탈출소동이 고스란히 전 세계에 TV 중계된 장면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지워지지 않고 생생하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미국이 인도차이나 반도의 ‘작은 삼류국가'로 여기던 베트남에 투하한 폭탄의 양은 인류사의 모든 전쟁에서 투하한 것보다 많았고, 2차대전 때 모든 전쟁 당사국이 투하한 폭탄의 3배나 되었다. 아직도 베트남 시골 지역에는 지뢰와 불발탄이 지천이다.
전후 생사기로 놓인 베트남 ..유일한 선택지는 개혁.개방
'사이공 함락'은 베트남의 입장에서 보면 '사이공 해방(Liberation of Saigon)'이다. 미국이 패배한 유일한 전쟁이었다. 하지만 전쟁 후 베트남의 상황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였다. 자본주의 체제의 남베트남을 사회주의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정치적·경제적 혼란, 그리고 보트를 타고 해외로 탈출하는 대규모 난민의 행렬, 1978년 캄보디아 침공에 따른 미국과 서방국가들의 경제제재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경제, 중국과의 국경 전쟁으로 중단된 경제 원조, 그리고 미·중 수교와 미·소 진영의 냉전체제 붕괴로 인한 외교적 고립. 생사 기로에 놓인 베트남이 택할 수밖에 없었던 유일한 선택지는 개혁·개방 정책이었다. 베트남 공산당이 1986년 6차 전당대회에서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시장경제로 전환시킨 '도이머이(쇄신)' 정책을 택한 배경이다. 브루킹스 연구소의 조나단 스트롬세스(Jonathan Stromseth)는 당시 "베트남의 사회주의 실험은 실패했고, 성장은 멈추었으며, 인플레이션은 연 500% 정도나 됐다"며 "정권이 살아 남으려면 개혁 외에는 다른 길이 없었다"고 말했다.
놀랍게도 당시 베트남에 대한 경제 제재 완화를 위해 클린턴 대통령을 설득하고 우호적인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가장 앞장선 인물은 베트남 참전용사로 당시 공화당 상원의원이던 존 매케인과 존 케리였다. 매케인은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쟁을 누가 반대했고 누가 찬성했느냐는 더 이상 나에게 문제가 안 됩니다. 나는 분노 속에 뒤를 되돌아보는 게 이젠 신물이 납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라고 설득했다. 또 지정학적 또는 경제적인 이유를 떠나 베트남이 미군 포로와 실종자 문제 등에서 그동안 미국의 요구에 성의를 다했기 때문에 미국도 상응 조치를 해주자는 논리를 폈다. 매케인은 1976년 10월 26일 하노이에서 폭격임무를 띠고 출격했던 자신의 전투기가 격추되어 부상을 입고 5년 넘게 포로생활을 한 베트남의 전쟁 영웅이다. 매케인과 케리는 20명의 공화당 의원들을 설득해 미 상원의 대(對)베트남 무역·통상 엠바고 해제 결의안을 62대38로 통과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1994년 2월 클린턴 행정부는 베트남에 대한 엠바고를 해제하고 미국 기업의 베트남 진출도 허용한다. 1995년 2월에는 미국 연락사무소가 베트남에 들어서고, 6개월 후인 8월에는 드디어 미국과 베트남 간에 대사급 수교가 이뤄진다. 미국이 전쟁까지 치렀던 베트남과 화해하게 된 배경에는 미국 내 반대 여론을 극복하게 만든 매케인과 같은 숨은 공로자의 힘도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빈손 귀국 김정은. '도이머이' 벤치마킹...,경제 올인해야
베트남이 종전 이후 20년 만에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통해 오늘날의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한 반면, 북한은 아직도 미국과의 수교를 위한 첫걸음이라 볼 수 있는 연락사무소조차 교환하지 못하고 있다. 사실 클린턴 행정부 당시 미국과 북한은 1994년 제네바 합의를 통해 한반도 핵위기 봉합에 나선다. 이때 양국은 연락사무소를 교환 설치하기 위한 협상도 진행했지만 최종 단계에서 북한의 군부 반대로 물거품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연락사무소가 설치됐더라면 지금 북·미 관계는 과거보다 크게 발전했으리라 추측해본다.
지난주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두번째 만남은 요란했던 빈수레에 그쳤다. 두 정상 간의 '하노이 담판'이 결렬되면서 두 정상뿐 아니라 베트남의 실망감도 적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적에서 친구로 변신한 대표적인 국가로, 관계정상화 이후 아시아의 성장엔진으로 급성장한 베트남은 이번 회담을 앞두고 국제사회로부터 북한의 롤 모델로 큰 관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은 북한 경제발전의 돌파구 마련을 위한 제재완화를 요구했지만, 트럼프는 완전한 비핵화가 우선이라며 거절했다. '적당한 합의'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고 회담장을 나온 트럼프에 대한 미국 내 여론은 전반적으로 우호적이다. '빈손'으로 귀국길에 오르면서 김 위원장은 미국과의 협상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깨달았을 듯하다. 특히 상대가 '직감과 배짱'을 내세우며 비전통적인 협상 기술을 뽐내는 트럼프인데, 김 위원장이 이번 회담을 안이하게 대처한 것은 큰 실수이다.
김 위원장은 베트남전 당시 잿더미에서 지금은 역동적인 개방 도시로 변환 하노이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지난해 미국 협상단에게 "내 아이들이 평생 핵무기를 짊어지고 살길 원치 않는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젠 군부의 반발을 의식하지 말고 핵을 과감히 버려야 한다. 그리고 베트남의 실용주의 정책을 벤치마킹해 경제발전과 북한 주민 생활 향상에 올인해야 한다. 트럼프는 핵 없는 북한이 '경제 강국'이 될 것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해왔다. 트럼프가 논란에도 불구하고 올해에도 대규모 한·미 군사훈련을 보류시킨 이유는 분명하다. 김 위원장이 좋은 방향으로 결단을 내리는 것을 기대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