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유럽연합(EU)은 지난해 수교 55주년을 맞았다. 2011년 맺은 한·EU 자유무역협정(FTA)이 양자관계를 한층 더 긴밀히 하는 계기가 됐다. EU 통계기구인 유로스타트에 따르면 FTA 체결 이후 양자 교역 규모는 1억 유로(약 1275억원)에 이를 정도로 불어났다. 2010년 이후 50%가량 늘어난 것이다. 그 사이 EU는 한국에 중국, 미국 다음으로 큰 수출시장이자 제1 투자자로 자리매김했다.
문제는 영국의 EU 탈퇴(브렉시트) 결정이 변수로 부상했다는 점이다. 영국은 오랫동안 한국의 EU 진출 전초기지 역할을 해왔다. 3월 29일로 정해진 브렉시트 시한까지 한 달여밖에 남지 않았지만, 영국과 EU 간 협상이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브렉시트 이후를 둘러싼 불확실성이 고조됐다.
피치는 영국이 과도기에 대한 합의 없이 EU를 탈퇴하는 '노딜 브렉시트' 위험이 크다며, 노딜 브렉시트가 영국 경제와 무역 전망에 상당한 분열을 초래할 것으로 봤다. 그러면서 노딜 브렉시트가 실현되면 영국이 1990년대 초 수준의 경기침체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당시 영국의 국내총생산(GDP)은 6분기에 걸쳐 2% 쪼그라들었다.
브렉시트는 한국에 먼 나라 얘기가 아니다. 한국은 브렉시트 이후에도 영국을 제외한 27개 EU 회원국과는 한·EU FTA로 통상관계를 유지할 수 있지만, 영국과는 새로운 양자협정을 맺어야 한다. 브렉시트를 계기로 영국은 물론 EU와도 새로운 관계를 설정해야 하는 과제를 떠안게 된 것이다.
◆세계 5위 경제국 英 EU 탈퇴 임박...'노딜' 대비 최우선
영국 정부에 따르면 지난해 영국의 국내총생산(GDP)은 2조8228억1700만 달러로, 미국·중국·일본·독일에 이어 세계 5위를 기록했다. EU에 가입한 뒤 약 45년간 EU 회원국으로서 36개의 무역협정을 통해 세계 60개국과 교역을 해온 결과다. 영국은 브렉시트 찬반 국민투표를 치르기 한 해 전인 2015년 전체 수출입의 15%를 EU를 통해 소화했다.
영국이 브렉시트 이후에도 EU와 이 정도 규모의 교역을 지속할 수 있을지 여부는 현재로선 장담할 수 없다. 피치의 경고대로 노딜 브렉시트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무역협정을 맺지 않은 국가들은 대개 세계무역기구(WTO) 규정 아래 교역을 한다. 문제는 노딜 브렉시트의 경우 영국이 WTO 가입국 지위를 잃게 된다는 점이다. WTO 규정에 따라 모든 무역 거래에서 보장되는 최혜국 대우(MFN)를 못 받게 될 수 있다는 얘기다. MFN은 관세·항해 등 양국 관계에 있어 제3국과 비교해 뒤지지 않는 최고의 대우를 보장하는 것이다. 노딜 브렉시트가 실현되면 영국과의 교역에서 관세 부담이 커질 수 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노딜 브렉시트가 되면 한·EU FTA에 근거해 한국산 수출·수입품에 적용되던 관세 혜택이 사라지는 데 따른 역풍이 불가피하다. 한국 수출에서 영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1%에 불과하지만, 양자간 FTA 체결을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라지브 비스워스 IHS마킷 아시아태평양지역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아주경제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영국은 그동안 EU 회원국 자격으로 다른 국가와 교역해왔기 때문에 (노딜 브렉시트의 경우) 가장 큰 문제는 어떤 국가와도 양자 간 무역협정을 갖지 못한다는 점"이라며 "아시아 국가들과 영국의 최우선 과제는 무역 불확실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새로운 양자 무역협정을 위한 협상을 서두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때문에 영국과의 양자 무역협정을 선점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일본이 브렉시트 이후 영국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가입을 환영한다면서도 양자 협정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워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는 걸 고려한다면 한국에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다만 브렉시트가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온 만큼 현실적으로 3월 말까지 한·영 FTA를 체결하는 건 불가능하다. EU의 '미니 헌법'에 해당하는 리스본 조약 50조에 따르면 EU를 이탈하는 국가는 탈퇴가 완료될 때까지 구속력 있는 독자 무역협정을 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EU와의 대화가 원활하게 진행될 경우 영국은 2020년 말까지 브렉시트 전환(이행)기간을 갖게 될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제3국과 무역협상을 진행할 기회가 생긴다. 시간이 촉박한 만큼 한·영 FTA의 골격은 기존 한·EU FTA를 차용한 뒤 재개정하는 방식이 유리할 것으로 보인다. 브렉시트 이후 양국 간 경제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마련되는 한·영 고위급 경제대화 채널의 역할에 관심이 모아지는 이유다.
◆"기존 한·EU FTA, 개정 필요"..."브렉시트가 기회 될 수도"
영국과의 양자 협정도 중요하지만, 나머지 27개 EU 회원국과의 교역도 중요하다. 현재 EU는 일본, 싱가포르와 FTA 체결을 완료했고, 호주·뉴질랜드·베트남과도 FTA 체결을 위한 막판 협상에 들어간 상태다. 특히 지난 1일 발효된 일·EU 경제연대협정(EPA)은 역대 최대 규모의 FTA로, 세계 GDP의 3분의 1이자, 전 세계 무역액의 40%를 차지하는 거대 자유무역경제권으로 꼽힌다. 일본이 유럽 시장에서의 무관세 혜택을 업고 한국보다 유리한 입지를 선점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브렉시트가 발효돼도 일단 현행 한·EU FTA의 골격은 그대로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한·EU FTA가 추가적인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한·EU FTA가 일본·EU, 캐나다·EU FTA 수준이 될 수 있도록 개정 작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한·EU FTA는 협상 기간까지 포함하면 12년 된 '낡은 협정'인 만큼 전자상거래, 전자주식거래 등을 포함,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춰 개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미하엘 라이터러 주한유럽연합대사는 '브렉시트 시대에 한·EU FTA가 효과를 내기 위해 개선할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브렉시트가 적용된다고 해서 기존 FTA를 변경할 필요는 없지만 중소기업 정책 등과 같이 새로운 협력 분야를 개선해야 한다"며 "EU는 원활한 통관 절차 등의 문제를 논의할 준비가 돼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한국 정부는 협상을 주저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과 EU는 경제 성장의 상당 부분을 수출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글로벌 다자무역, 자유무역 체제를 필요로 한다. 한국은 최첨단 기술과 제조업에서 확실한 강점을 갖고 있는 데다 제4차 산업혁명 강국인 만큼 글로벌 경제 둔화의 해법으로 통하는 신기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라이터러 대사는 또 지식재산권 보호 부문에서도 한국은 비교적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어 EU 내 고급 브랜드 수출업자들이 모조품 통제 등에 대한 기대감을 나타낼 수 있을 것으로 봤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브렉시트를 계기로 EU의 GDP가 1.5~1.6% 감소하고 영국의 GDP는 약 8% 급감할 것으로 전망했다. EU 집행부 성격을 띠는 EU집행위원회(EC)도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의 경제성장률이 2018년 1.9%에서 올해는 1.3%로 둔화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럼에도 브렉시트가 한국 등 아시아 주요국에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라지브 이코노미스트는 "EU 지역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들은 브렉시트 이후 EU 관세동맹의 혜택을 얻기 위해 기업 본사나 생산 거점을 다른 EU 국가로 옮길 가능성이 있다"며 "노딜 브렉시트가 되는 경우 새로운 관세 정책을 고려할 때 제품 선적 기점을 아시아 공장으로 이전하는 것이 경제적일 수 있다는 계산이 가능한 만큼 이미 EU와 FTA를 맺은 한국과 일본은 이를 기회로 삼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