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 세계은행 총재가 돌연 사임을 발표했다. 임기가 3년 이상 남은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사임 소식에 주요 외신들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와의 불화를 그 배경으로 주목하고 있다. 차기 총재 지명을 둘러싼 혼란도 예상된다.
월스트리트저널(WSJ) 등 주요 외신에 따르면 세계은행은 이날 성명을 통해 김 총재가 내달 1일 총재직에서 물러난다고 밝혔다. 김 총재는 향후 개발도상국에 인프라 투자를 하는 민간 회사에 합류할 예정이다.
2021년까지 임기가 남아있는 상황에서 김 총재의 갑작스러운 사임 배경에 관심이 쏠리는 가운데 CNBC는 두 명의 소식통을 인용하여 김 총재의 사임은 자발적인 의지에 따른 것이며 트럼프 행정부에 의해 “밀려나는 것이 아니다”라고 전했다.
하지만 김 총재는 7일 직원들에게 보내는 이메일에서 “민간 부문에 합류하는 기회는 예상치 못했던 것"이라고 밝히면서, 조기 사임을 결정한 것이 완전한 자의가 아니라고 해석할 만한 여지를 남겼다. 김 총재는 이어 "(이번 결정이) 기후 변화와 신흥시장의 인프라 부족 같은 주요 글로벌 이슈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길이라고 결론내렸다"고 말했다.
주요 외신들은 트럼프 행정부와 세계은행이 기후변화 정책이나 중국에 대한 대출 등에서 불화를 겪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BBC는 세계은행이 기후변화 억제를 위해 석탄발전 프로젝트 지원을 중단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의 석탄산업 부활을 공약하면서 반대 노선을 걸었다고 지적했다. 또한 세계은행의 최대 주주인 미국 재무부는 세계은행이 중국에 너무 많은 대출을 제공하고 조직 내 보수가 지나치게 관대하다며 비판해왔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전했다. 미 재무부는 세계은행 이사회 의결권의 16%를 보유하고 있다.
지난해 트럼프 행정부는 세계은행 출자금을 13억 달러 증액하는 결정을 내놓기도 했으나 그 조건으로 대중 대출의 대폭 축소를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니혼게이자이는 출자금을 통해 국제기구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트럼프 행정부와의 갈등이 김 총재의 중도 하차로 이어졌다고 분석했다.
김 총재의 갑작스러운 사임으로 차기 총재 선정을 둘러싼 혼란도 불가피해 보인다. 지금까지 세계은행 총재는 70년 이상 미국 대통령이 지명해왔다. 블룸버그는 이번에도 트럼프 대통령이 총재를 지명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통신은 트럼프 행정부가 세계무역기구(WTO)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등 국제기구에 대한 불신이 상당한 만큼, 트럼프 대통령이 추천하는 후보를 두고 논란이 생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주로 개도국의 경제개발 지원이라는 세계은행의 역할을 축소하는 후보를 지명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은 2016년 세계은행의 민영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미국 대통령이 세계은행 총재를 지명하는 관행을 두고 반발도 예상된다. 시민단체들은 1944년 브레턴우즈 협정 이후 미국이 세계은행 총재를 임명하고 유럽이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를 임명하는, 불문율로 자리잡은 국제 금융기구의 총재 선출 관행을 끝내라고 요구해왔다. 김 총재의 연임을 앞두었던 2016년 세계은행 직원조합 역시 성명을 통해 “밀실 거래에 따른 미국인 남성 총재”를 거부한다면서 투명한 총재 인선 절차를 촉구한 바 있다.
국제 민간구호 단체인 옥스팜인터내셔널의 나디아 다르 소장은 WSJ에 “전 세계를 대표하는 강력하고 선한 지배구조를 갖기 위해서는 리더십 결정권을 한 나라가 독점해서는 안 된다”면서 “전 세계가 정치·경제적으로 변화하고 있는 만큼 국제기구의 리더십 선정도 근대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학박사이자 보건 전문가인 한국계 미국인 김 총재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지명으로 2012년 아시아계 최초로 세계은행 총재직에 올랐다. 이후 2016년 9월 연임에 성공해 2017년 7월 1일부터 5년 임기를 새로 시작했다. 김 총재는 세계보건기구(WHO) 에이즈 국장을 지냈으며, 2009년 한국계 최초로 아이비리그 대학 중 한 곳인 미국 다트머스대 총장에 오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