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도 '기업언어'인 회계가 존재한다. 우리가 쓰는 회계와는 꽤 다르다. 북한은 중앙집권적인 경제를 효율적으로 관리하려고 회계를 이용해왔다. 즉, 회계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재정수입 확대다.
남북경협시대가 오더라도 양측 회계제도 차이는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10일 본지가 만난 이태호 삼일회계법인 남북투자지원센터장은 국내에서는 드물게 이런 문제점을 지적해온 전문가다. 그는 "경제 개방보다 회계 개혁이 먼저"라고 힘줘 얘기했다. 믿을 만한 회계 없이는 남북경협 활성화도 이뤄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공인회계사회는 얼마 전 남북회계협력위원회를 만들었다. 북한이 새로 회계 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게 돕기 위해서다. 위원회는 국내 관련학회와 회계업계 그리고 북한 전문가로 구성돼 있다.
◆북한 회계는 여전히 옛 소련식
북한 회계법은 회계를 크게 회계계산과 회계분석, 회계검증으로 나눈다. 회계계산은 일상적인 자금변동을 기록하고 결과를 확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재무회계에 비하면 단순부기에 가까운 개념이다.
다시 회계분석은 회계계산을 바탕으로 재정적인 이해관계를 파악한다. 제조원가를 포함한 성과분석이나 정부기관 경영평가와 비슷할 수 있다. 끝으로 회계검증은 우리나라로 치면 회계감사에 해당한다. 검증 대상은 국가기관이나 기업소다.
북한은 회계 계정과목을 국가에서 규정하고 있다. 계정과목은 임의로 바꾸거나 고칠 수 없다. 그나마 북한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복식부기를 쓴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이는 남북경협을 진행할 수 있는 최소 조건이다.
북한은 옛 소련식 회계제도를 받아들였다. 이는 같은 사회주의국가인 중국과 베트남도 마찬가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중국과 베트남은 개혁·개방에 나서면서 회계기준을 국제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2006년 국제회계기준(IFRS)을 바탕으로 중국기업회계준칙(CAS)을 제정했다. 베트남은 2017년 회계법을 개혁하면서 2020년부터 IFRS를 도입하기로 했다.
이태호 센터장은 "베트남은 회계개혁 면에서 중국보다 15년가량 늦었다"며 "북한은 베트남에도 크게 못 미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북한은 먼저 경제체제를 전환한 나라를 참고해 회계제도를 보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개성공단 회계규정 본보기 삼아야
지금은 문을 닫은 개성공업지구 회계규정은 2005년 만들어졌다. 이는 자본주의식 회계규정에 가장 가까운 제도다. 북한이 회계제도 전반을 개혁한다면 당시 회계규정을 본보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개성공업지구 회계규정은 기업재정규정과 회계검증규정, 세금규정을 비롯한 다양한 준거규정을 허용했다. 물론 입주기업 대부분이 임가공업체였기 때문에 회계처리는 단순했다. 투자 규모도 크지 않아 국제회계기준까지 도입할 필요성은 적었다.
입주기업은 개성공업지구 세무서에 보고했다. 북한은 재무보다 세무정보에 관심을 두었고, 회계규정도 이런 이유로 세무를 중심으로 쓰여졌다.
이 센터장은 "북한은 외국인투자기업이나 경제특구 소재기업에 대해 별도규정을 둔다"며 "바로 별도규정에 국제회계기준을 도입하는 식으로 회계제도를 개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남북 회계인력 교류 확대도 필요
북한이 갑자기 회계기준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기는 어렵다. 먼저 남북 회계인력이 자주 만나야 한다. 기본적인 회계용어부터 차이가 크고, 이를 풀려면 지속적인 교류가 필수다.
이 센터장은 "개성에 설치한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라며 "남북대화 의제에 회계를 추가하고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고 전했다.
우리 회계인력이 북한에서 활동하려면 정부도 지원해야 한다. 과거 개성공단이 문을 열었을 때에는 북한이 먼저 외국인투자기업에 대한 감사를 요청하기도 했다. 회계검증이 가능한 인력이 그만큼 부족하다는 얘기다.
그는 "정부가 학술 교류와 세미나, 전문가 왕래, 회계전문인력 양성을 추진할 수 있게 뒷받침해줘야 한다"며 "남북 회계용어를 표준화하는 작업도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