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 더불어민주당 신임 당대표는 지난 25일 서울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열린 제3차 정기전국대의원대회(전당대회)에서 대의원·권리당원·국민여론조사·일반당원 여론조사 등 4개 항목 모두에서 송영길·김진표 의원을 압도했다.
45%가 반영돼 당락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대의원 현장투표에서 이 대표는 40.57%를 득표해 각각 31.96%와 27.48%를 얻는데 그친 송·김 의원을 눌렀다.
10%가 반영되는 국민여론조사에서는 이 대표가 높은 인지도를 바탕으로 44.03%을 기록, 송(30.61%)·김(24.37%) 의원과의 격차를 더욱 벌렸다.
5%가 반영되는 일반당원 여론조사에서는 이 대표(38.2%)와 송 의원(36.3%)은 박빙의 승부를 펼쳤다. 김 의원은 25.5%에 그쳤다.
월 1000원의 당비를 납부하는 권리당원은 71만명 규모인 반면, 당비를 납부하지 않고 당원명부에만 올라있는 일반당원은 360만명에 달한다.
이 대표는 김 의원의 강세가 점쳐졌던 권리당원 ARS 투표에서도 우위를 보였다. 이 대표는 40%가 반영되는 권리당원 투표에서 45.79%로 송 의원(28.67%)과 김 의원(25.54%)을 여유 있게 따돌렸다. 오히려 대의원 투표보다 격차가 더 컸다.
박상병 인하대 정책대학원 교수는 “친문(친문재인) 지지자들이 이해찬 대표의 진보정권 20년 프로젝트라든지, 당청 관계에서의 강력한 리더십을 원한 것이 선거 결과로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당권주자 3명이 모두 친문을 자처하고 나섰지만, ‘뼈노’(뼛속부터 친노무현)인 이 대표의 영향력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평가다.
박 교수는 “반대로 생각하면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고,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김진표 의원의 ‘경제’, 송영길 의원의 ‘세대교체론’이 민주당 핵심 지지층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30년 전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돼 교육부 장관, 국무총리, 당대표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민주당 역사의 ‘산 증인’이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과 ‘맞담배’를 피우며 내각을 이끌던 ‘실세 총리’가 다시 한번 집권여당의 ‘실세 대표’로 당의 전면에 나선 모양새가 됐다.
충남 청양 출신의 이 대표는 서울대 사회학과 재학 시절 학생운동에 투신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을 선포한 1973년 10월 교내 유인물 사건에 연루돼 수배됐고, 이듬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1년 가까이 옥고를 치렀다.
1980년 대학에 돌아온 이 대표는 복학생협의회 회장을 맡아 활동하다 그해 6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다시 구속됐고, 2년 만에 ‘성탄절 특사’로 풀려났다.
1987년 13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낙선한 후 재야 입당파들과 평화민주당에 입당, 이듬해 13대 총선에서 서울 관악을 지역구에 출마해 김종인 민주정의당 후보를 꺾고 국회에 입성했다.
이후 관악을 지역에서만 17대 총선까지 내리 5선을 했다.
그는 1998년 김대중 정부 초대 교육부장관, 노무현 정부의 두 번째 국무총리로 임명됐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당의 요청을 받고 연고도 없는 세종시에 출마, 당시 ‘충청의 맹주’였던 심대평 자유선진당 대표를 따돌리고 당내 최다선인 6선 의원이 됐다.
이어 민주통합당 당대표에 올랐으나, 18대 대선을 앞두고 문재인·안철수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사퇴압박을 받은 끝에 중도 하차했다.
2016년 20대 총선 때는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 체제에서 공천 배제된 뒤 탈당, 무소속으로 당선되고서 복당했다.
이번 전당대회에서는 21대 총선 불출마와 함께 총선 승리와 정권 재창출을 자신의 ‘마지막 소임’이라고 약속, 당대표로 화려하게 복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