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 칼럼-중국정치7룡] 시진핑보다 유명한 중국의 퍼스트레이디 펑리위안

2018-08-10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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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진핑 중국 공산당 총서기⑫

시진핑-펑리위안 부부[사진=신화통신]

10여년전 만 하더라도 펑리위안(彭麗媛)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보다 훨씬 더 유명했다. 시진핑 주석이 2007년 가을 후진타오(胡錦濤)를 잇는 황태자로 등극할 때까지 시진핑은 ‘펑리위안의 남편’으로 소개될 정도였으니.

◆고향은 '수호전' 영웅들의 본산

시진핑 주석의 부인 펑리위안은 1962년 11월 20일 산둥성 서남부 허저(菏泽)시 윈청(郓城) 펑씨 집성촌인 펑좡(彭庄)촌에서 태어났다. 윈청현은 우리나라 임꺽정의 청석골격인 '수호전'의 양산박(梁山泊) 동쪽에 인접해 있다. 송강, 조개, 오용 등 양산박 최고 두령급 포함 “양산 108영웅 중 72영웅이 윈청 출신”이라는 말이 전해질만큼 윈청현은 '수호전' 영웅들의 본산이다.

현내 곳곳에는 수호전 관련 유적지와 무술학원이 널려있다. 윈청현의 이런 역사 지리적 환경과 펑리위안의 카리스마가 넘치는 용모와 태도는 그가 후일 군에 자원 입대해 장성급 대우를 받으며 성악가로 활약한 이력(중국인민해방군 예술학원 원장 역임)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지리환경 결정론).

펑리위안의 아버지는 원청현 문화관장을 지냈고, 어머니는 윈청현 현립 극단 주연급 배우였다. 부모로부터의 선천적 유전인자를 물려받고 후천적 교육환경을 지원받은 그는 네다섯 살 때부터 윈청현 극단 아동 배우로 활약했다. 윈청 제1중학교를 졸업한 펑리위안은 1977년 산둥예술학교(한국 예고에 해당)에 입학, 민족 성악을 공부했다. 1980년 그녀는 베이징에서 처음 열린 ‘전국 문예 공연 대회’에서 참가, 민요 창법을 현대적으로 되살린 독특한 창법으로 베이징 음악계를 깜짝 놀래켰다.

중국인민해방군 문예병 시절 펑리위안(왼쪽), 1983년 북한 김정일 방중시 한국어와 중국어를 섞어가며 북한 혁명가곡 <꽃파는 처녀>를 열창하는 펑리위안(오른쪽)[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같은 해 펑리위안은 중국인민해방군에 자원 입대, 문예병이 됐다. 1982년 2월 초 펑리위안은 중국중앙CCTV의 설날 특집프로그램 ‘춘제완후이(春節晩會)'에 고유의 민족 성악을 대표하는 가수로 출연하여 '희망의 들판에서 (在希望的田野上)'를 불렀다. 중국 현대 민족성악계 여왕 대관식 행사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나이, 꽃보다 아름다운 만 19세였다.

1983년 북한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1차 비공개 중국 방문 행사때 펑리위안은 한국어와 중국어를 섞어가며 북한의 대표적 혁명가곡 ’꽃파는 처녀(卖花姑娘)'를 불렀다.(1)* 이듬해 펑리위안은 중국음악학원 성악과에 입학해 정식으로 성악교육과 왕인쉔(王音旋)과 진티에린(金铁霖) 교수를 사사(事師)했다.

1985년 펑리위안은 문화부에서 주최한 '제1회 전국 녜얼 시싱하이(聂耳、洗星海; 20세기 전반 중국 대표적 작곡가) 음악작품 민족창법팀'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같은 해 7월,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 그는 이듬해 CCTV가 주최하는 제2회 전국청년가수 대회전에 민족성악 최우수상을 획득했다.

◆시진핑, 펑리위안을 만난지 40분만에 결혼 결심

눈부신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펑리위안이 중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인기가수로 전성기를 누리던 1986년 말, 한 친구가 펑리위안에게 신랑감 하나를 소개해줬다. 그는 당시 푸젠성 샤먼 부시장 시진핑(당시 33세, 그녀와 아홉 살 차이, 이혼 상태)이었다.(2)*

펑리위안은 일부러 뚱뚱하게 보이는 군복을 입었다. 상대방이 예쁜 여자만 찾는 외모지상주의자가 아닌가 하며.그런데 시진핑 역시 우리나라 1970년대 교련복 비슷한 반 군복 차림으로 나타났다. 시진핑은 그에게 “히트한 노래는 뭐죠?”, “출장비는 얼마나 받죠?” 등 너절한 녀석들이 묻는 하찮은 질문이 아닌, “성악에는 몇 가지 창법이 있죠?” 등 품격있는 질문을 했다. 펑리위안은 그 자리에서 첫눈에 반했다. 후일 펑리위안은 그 ’첫눈에 반함‘을 회고했다.

“그때 내 심장엔 갑자기 찌르르 전류가 흘렸어요. 이 남자야말로 내가 꿈에 그리던 이상형 남편감이라고요! 그이의 성품은 순후했으며 사상은 고상했어요, 그이가 훗날 내게 고백했어요. ‘당신과 처음 만난 지 40분쯤 되었을 때 당신을 아내로 맞이할 거라고 결심’ 했다고.”

그렇다면 펑리위안은 시진핑을 만난 지 몇 분쯤 되었을 때 그를 남편으로 삼을 거라고 결심했을까? 필자는 그녀의 결심이 그의 결심보다 훨씬 빠른 약 5분쯤 되었을 때라고 합리적 추정된다.

그러나 펑리위안의 부모는 ‘그 결혼 난 반댈세’ 였다. 그의 부모는 딸이 고관대작의 자제 집안으로 시집가는 걸 무척 꺼렸다. 혹시라도 잘못돼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고관대작 가문의 사윗감이 불편했던 것. 더구나 중일전쟁, 국공내전, 대약진 운동, 문화대혁명의 파란만장한 시대를 몸소 겪어온 20세기 전·중반 중국의 부모 세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과부 또는 생과부로 만들기 십상인 정치가 집안이 뭐가 좋겠는가?

하지만 시진핑은 펑리위안을 안심시켰다. “내 아버지도 농민의 아들이었소. 우리 집안 모두 소탈하고 부담 없으며 집안 아이들 모두 평민 가문에 장가 들고 시집갔소. 이런 우리 집안 사정을 알면 당신 부모도 나를 기쁘게 받아들일 거요.”

펑리위안도 문화대혁명 시절 벽촌 지역으로 던져져 남 못지않은 고생을 했다고 여겨왔으나, 시진핑이 청소년 시절 겪은 고난에 비하면 자신의 고생은 ‘참새 발가락의 피’라는 생각에 눈물을 글썽거렸다.

◆ 결혼식은 구내식당에서

"아내가 어머니보다 중요하다. 어머니는 나의 3분의 1 인생을 책임지지만, 아내는 나의 3분의 2 인생을 책임지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영원히 나의 어머니지만 내가 잘못하면 아내는 남의 아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알리바바 총수 마윈(馬雲)>

1987년 9월 1일(음력 7월 9일 길일), 펑리위안과 시진핑은 간단한 혼례를 치뤘다. 베이징에 일하던 그는 샤먼시 부시장 시진핑의 전화를 받고 직장에 보고한 후 후 샤먼으로 날아갔다.

펑리위안이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시진핑은 그를 낚아채다시피 사진관으로 데려가 결혼사진을 찍었다. 등기소 직원이 결혼등기증을 부시장 관사로 배달했다. 시진핑은 시장에게 결혼 사실을 정식 보고했다. 시장은 시당위원회와 시정부 고위간부들에게 거두절미하고 간단히 통보했다. “오늘 저녁 7시에 구내식당에서 회식 있으니 전원 집합!”

저녁 7시경, 신랑과 신부는 구내식당 문 앞에서 나란히 서서 ‘하객’들을 영접했다. 사람들 대다수는 자신이 ‘하객’들인 줄 몰랐다. 창에 걸려 있는 크고 붉은 ’喜(기쁠 희)‘자 두 개를 보며, 서로의 얼굴만 처다볼 뿐이었다. '이게 도대체 누구 결혼식이지?' 궁금해했다. 그때, 시정부 비서장(총무국장)이 도착했다. 펑리위안을 한눈에 알아 본 그는 시진핑과 악수하면서 물었다. ‘옆에 서 있는 여인은 유명가수 펑리위안이 아닌가요? 그가 누구의 결혼식 축가를 불러주러 여기까지 왔나요?’

시진핑이 짧게 대꾸했다. ‘내 아내요.“

신혼 나흘 째, 펑리위안은 베이징에서 열리는 전국예술제에 참가하기 위해 시진핑 곁을 떠났다. 연이어 캐나다와 미국 등 두달여간 북미 순회공연을 나갔다.

1987년 9월 1일, 펑리위안과 결혼 당시 푸젠성 사먼시 부시장이던 시진핑이 푸젠성 성장, 저장성 당서기, 상하이 당서기로 승승장구하며 마침내 2007년 10월 26일 후진타오를 잇는 차기 후계자로 낙점되어 정치국 상무위원(서열 6위)로 베이징에 부임할 때까지, 강산이 두 번 바뀌는 기나긴 세월 동안 부부는 같이 사는 기간보다 헤어져 있는 기간이 훨씬 길었다. 펑리위안의 직장 소재지 베이징과 시진핑의 근무지 화둥지역의 거리는 서울과 부산의 거리의 네 다섯 배인 1200㎞~2000㎞였다. 부부의 지리적 거리가 워낙 거리가 먼데다가 모두 워낙 공사다망하여 부부는 20년간 ’준(準) 견우와 준 직녀‘였다.

어느 날 어렵사리 짬을 내어 시진핑은 베이징의 아내를 만나러 갔다. 하지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펑리위안은 특집 방송 연출 요청 전화를 받았다. 그는 전화를 끊고 한나절 동안 남편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 봐 말을 하지 못했다. 눈치를 챈 시진핑은 오히려 아내를 위로했다.

” 괜찮아, 당신이 지금 가더라도 우리는 결국 만나게 되는데 무슨 걱정이야. 나 때문에 당신을 무대에서 떠나게 할 수 없어, 나는 결코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요.“

시진핑은 자기자신에 대해 항상 엄격했다. 펑리위안이 어쩌다 그의 곁으로 갔을 때 그는 각별히 처신에 신경을 썼다. 으레 부부 동반하는 모임에도 ”당 간부가 아내를 데리고 다니면 주위에서 수군거리고 좋지 않은 소문이 퍼지기가 쉽다” 며 아내를 동반하지 않았다. 시진핑은 펑리위안에게 자주 주의를 환기시켰다. “우리는 당간부 부부다. 한시라도 유혹의 함정에 빠져선 절대 안 된다.”

펑리위안은 시진핑을 이야기할 때면 항상 밝은 웃음을 얼굴에 가득히 담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이는 세상에서 최고 우수한 남편이어요. 나는 그이가 세상 모든 여인의 마음속 가장 이상적인 남편이라고 생각해요”

펑리위안은 자신보다 9살 연상인 시진핑이 마치 큰 오빠가 귀여운 막내 누이동생 대하듯 자신을 사려 깊게 대한다고 자랑한다. 음치에 가까운 시진핑은 노래를 부르길 좋아하지 않지만 펑리위안이 부른 노래만은 빠짐없이 즐겨 듣고 이따금 혼자 나직하게 흥얼거리기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계속)

◆주석----------------------------------

(1)*북한의 김정일은 평생 8번 방중했다. 1983년 1차 방중은 비공개, 단 북한 관방에서 다큐 영상물로 제작했다. 그 외 2000년, 2001년, 2004년, 2006년, 2010년 5월, 2010년 8월, 2011년 모두 일곱 차례 방중했다. 김정일의 첫 방중시 즉 1983년 1차 비공개 방중행사 당시 유명가수 펑리안은 김정일에게 <꽃 파는 처녀(卖花姑娘)> 노래를 선사했다.

(2)*시진핑은 1979년 26세때 고위 외교관 커화(柯華)의 딸인 커샤오밍(柯小明 별명 커링링(柯玲玲 당시 28세)이 첫번째 아내였다. 1982년 결혼 3년만에 커샤오밍은 시진핑과 이혼을 하고 영국유학을 떠났다. 두 사람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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