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대법원 본관에도 디케 상이 있는데 눈을 뜬 상태로, 칼 대신 법전을 들고 있는 게 특이하다. 하지만 국내외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디케 조각상은 두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첫째, 항상 저울을 들고 있다는 것. 둘째, 칼이나 법전을 든 손보다 저울을 든 손이 위에 위치한다는 것. 이는 강제성의 칼보다 형평성의 저울이 우선하고 우선해야 한다는 법의 정신을 말해주려는 건 아닐까?
세상에 이음동의어는 없다. ‘법률’의 ‘법(法)’과 ‘률(律)’은 다르다. ‘법’과 ‘률’은 엄밀히 말해 동의어라기보다는 유사어이다. 중국 사상 최초의 사전인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의하면 법은 곧 형벌의 ‘형’(刑)을 뜻한다. 法의 고자(古字)는 灋이다. 이는 물 수(氵)와 '해태 치(廌)'와 '갈 거(去)'의 세 글자가 합쳐진 것이다. ‘물’은 사회변화의 흐름에 맞춤을 의미한다. ‘해태’는 시비선악을 가리는 능력을 갖고 사악한 자를 뿔로 처박는 정의의 동물이다. ‘去’는 문자 그대로 악을 제거하는 것, 즉 잘못된 것을 벌하는 강제성이 내포돼 있다.
‘律’은 원래 중국 고대음악의 음률에서 나왔다. 12음중 양6음을 ‘률’이라 하며 음6음을 ‘여(呂)'라 한다. '설문해자'는 ‘률’이 균포(均布)를 뜻한다고 했다. 균포란 악기소리의 강약과 청탁을 조율하는 것처럼 세상을 고르게 하는 형평성이 함축돼 있다. ‘률’은 전국시대 말엽 진 나라 재상 상앙이 ’법‘을 ’률‘로 사용하면서부터 한률, 당률, 명률, 청률에 이르기까지 역대 황조의 기본법전을 ‘률’이라고 이름 붙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부터 조선말엽까지 ‘률’이 법률을 대표했다. 선조들의 한문 학습의 입문서였던 '천자문(千字文)'의 8번째 구절도 ‘율여조양(律呂調陽, 법은 세상을 고르고 밝게 만든다는 의미)'이 나온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법의 이념과 기능을 세상을 ‘바르게’가 아닌, ‘고르고 밝게 한다’ 는 법의 형평성을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동양에서도 디케의 ‘칼’과 ‘저울’의 그것처럼, ‘법’은 강제성을 ‘률’은 형평성을 뜻했다. 디케가 칼보다 저울을 더 높이 치켜들 듯 ‘률’의 함의가 ‘법’에 비하여 넓고 우선했다.
'성경' 역시 ‘법률’이라 하지 않고 ‘율법’이라 하고 있다. 다만 서양에서는 정의의 여신상으로 법의 강제성과 형평성이 ‘칼’과 ‘저울’로 상징화되어 있는 반면, 동양에서는 ‘법’과 ‘률’이라는 문자로 직접 표현된 것이 다르다면 다른 점이다.
이렇게 진리는 때로는 굽이굽이 돌아 먼 데서나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바로 지금 여기 우리 생활속에 문자로 실존하고 있다.
세상에 법 없인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흔히들 말하는 “법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은 사실 법 원래 의미의 ‘형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다시 말해서 강제성의 ‘법’없인 살 수 있어도 형평성인 ‘률’없인 살 수 없다. 법률이 ‘법’의 강제성만 강조하고 ‘률’의 형평성을 잃는다면 그것은 이미 법률이 아니다. 법률이라는 신비화된 이름으로 지배집단이 피지배집단에게 가하는 폭력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단순히 법조문에 의한 지배를 지향하는 형식적 법치주의에서 실질적 평등과 같은 정의의 실천을 요구하는 실질적 법치주의 국가로 나아가야 한다. 법의 생명은 형평성이다.
강제성의 ‘칼의 법’에 무조건적 복종만을 강조하기보다 형평성의 ‘저울의 률’이 우위에 서서 인간의 존엄성과 정의를 실현하는 ‘율치(律治)'주의 국가사회를 만들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