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해방이 되었으나, 몽골·중국·동남아를 떠돌며 위안부 생활을 했던 그녀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더럽혀진 몸을 자책하며 입에 풀칠이라도 하기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미군기지촌의 접대부였다. 당시엔 양공주라고 불렀고, 엘레나나 순희란 이름이 붙었다. 30대 중반까지 그렇게 살다가 더 이상 손님들이 찾지 않을 때쯤 청량리 집창촌으로 옮겨 포주 일을 한다. 그렇게 해서 늙은 뒤 독거노인으로 쓸쓸히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 집안엔 창녀가 없다."
이 말은 위안부의 역사적 사실을 처음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가 집안 어른에게서 들었던 말이며, 해방 이후 그가 또다른 고통을 시작하는 운명의 '단언'이었다. 한국 사회는 강제로 위안부로 붙들려 갔다가 돌아온 이 땅의 여성들에게, 40여년간 '부당한 단죄'를 지속했다. 해방이 됐지만, 한국사회는 성노예의 굴레로부터 위안부를 해방시켜주지 않았다는 게 심용환의 문제의식이었다.
이런 지적이, 일본의 원천적인 전쟁범죄에 대한 엄격한 단죄를 양비론 쯤으로 줄여주려는 것은 아니라고, 심소장은 힘을 주어 말한다. 대한민국이 100년의 역사 속에서 그간 성숙시킨 '사회적 이성'이 지금쯤은, 우리 사회가 해방 이후 여성들에게 했던 심각한 가혹행위에 대한 자성(自省)을 할 때가 되었다는, 시대적인 심문에 가까운 발언이었다.
1991년에야 겨우 터져나올 수 있었던, 위안부의 피눈물 나는 일성(一聲)이 있기까지, 우리는 그녀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했는지...심소장의 강연영상은, 100년 대한민국의 부끄러운 민낯을 들춰내 보여준다.
이상국 아주닷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