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국칼럼]아파트경비원과 에어컨의 경제학

2018-08-06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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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사람이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낫다고 하지만··· 여름 징역은 자기의 바로 옆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로 누워 칼잠을 자야 하는 좁은 잠자리는 옆사람을 단지 삼십칠도의 열덩어리로만 느끼게 합니다.”(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88) 중에서)
 

[사진=윤주혜 기자 ]



지난달 24일 JTBC 손석희 앵커는 ‘경비실에 에어컨을 달지 말아주십시오’라는 인상적인 뉴스브리핑을 했다. 40도에 육박하는 폭염에, 시공업체가 아파트 경비실에 에어컨을 무료로 달아주겠다고 하자 경비원들이 거절한 사연이었다. 그곳은 부산에 있는 영구임대 아파트로, 주민 상당수가 에어컨이 없었다. 한 경비원의 말. “꼭대기층 입주민보다 아파트 1층 경비실이 덜 더워요. 다들 선풍기로 견디는데, 경비실에만 떡하니 에어컨을 설치하면 주민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서로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손석희 앵커는 이 대목에서 폭염 속에서도 잃지 않은 우리 사회의 ‘염치’를 말했다.
하지만 손 앵커는 그 옆 아파트 얘기는 구체적으로 하지 않았다. 동일한 제안을 받은 그 아파트에서는 주민들이 반대해 경비실 에어컨 설치가 무산됐다. 이들은 염치가 없었을까. 아니다. 스스로도 에어컨 없이 살아야 하는 주민들은 얼마 안 되지만 전기료가 오르는 것이 걱정스러웠을 뿐이다. 영구임대아파트를 짓는 LH(한국토지주택공사)는 경비원들의 고령화로 폭염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10억원을 들여 경비실 에어컨 설치에 나섰지만 전기료 문제에 자주 부딪혔다. LH는 1000가구 아파트의 경우 1.2kw 벽걸이 에어컨을 경비실 2곳에 하루 8시간 가동하면 가구당 주민 부담이 55원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이 요금 또한 지자체와 협의를 하면 공동전기료를 지원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한다. LH가 직접 해결해주면 안 되느냐고 물었더니 특정 아파트에 대한 특혜 논란 때문에 어렵단다. LH 임대아파트 경비실 159곳이 에어컨 설치가 되어 있지 않다(홍철호 의원 자료)는 뉴스도 최근 올라왔다. 대개 전기료를 걱정한 주민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경비실 에어컨을 거절한 경비원들의 ‘염치’는 아름답지만, 그 염치마저도 힘겨운 ‘선풍기 아파트’의 주민들을 몰염치나 파렴치로 몰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재해에 해당하는 폭염과, 그것에 대처하기 어려운 가난일지도 모른다. 여름 징역을 살면서 옆사람의 삼십칠도에 잠을 설쳤던 신영복 선생의 ‘열받는 칼잠’처럼, 곤궁이 주민들의 마음을 비좁게 했을 것이다. 에어컨은 오랫동안 서민들에게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사치품이었다. 이제 국내 에어컨 보유가구 비율이 70%를 넘어섰으니 생필품에 가깝다. 하지만 그 혜택을 못 누리는 30%의 이야기를 우리는 만나고 있는 것이다.

손석희의 에어컨 염치론이 ‘바람’을 일으킨 것일까. 아니면 삶의 여유에 기반한 공동체 의식이 최근 사회변동을 거치면서 진화한 것일까. 경비실 에어컨 미담 또한 자주 등장한다.

서울 서초구 방배동의 한 아파트 엘리베이터엔 이런 글이 붙었다. “이웃 여러분 안녕하세요. 대책 없는 무더위에 경비 아저씨들은 어떻게 견디시나 늘 마음 한편이 무겁습니다. 경비실에 냉방기가 설치되면 각 가정에서 전기료 월 2000원가량을 낼 의향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주민들은 찬성의 포스트잇을 붙였고, 게시글을 붙인 주민이 자비로 에어컨을 설치했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한 아파트에선 한 주민이 정문과 후문 경비실에 에어컨 2대를 기증하고 전기료까지 직접 내겠다고 나섰다. 이 아파트 관리소장은 “돈이 많아서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분을 통해 알게 됐다”고 말한다. 이런 일만 있는 건 아니다. 수원시의 한 아파트단지에선 주민들이 에어컨을 설치하자고 해도 입주자 대표단에서 전기료 부담문제에 대한 이견으로 번번이 퇴짜를 놨다. 배려와 부담 사이에 염치의 저울은 폭염 속에서도 어지러이 오간다.

프랑스 사회과학대 한국학 교수인 발레리 줄레조(Valerie Gelezeau)는 ‘아파트공화국’에서 한국의 아파트 경비원을 ‘저임금의 하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6일 부산시 동구의회 의원이 부자(父子) 경비원이 함께 근무하던 아파트에서 아들이 사고로 숨지자 부친을 다른 곳으로 전보조치하라고 요구한 사실이 밝혀졌다. 아파트 입주민 대표이기도 했던 이 구의원은 당에서 제명됐다.

작년 3월 공동주택관리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는데, 경비원에게 입주자나 관리주체가 부당한 업무지시나 명령을 할 수 없다고 명시하고 있다. 2014년 주민의 모욕적인 말을 듣고 분신한 강남구 압구정동의 아파트 경비원 사건이 이런 입법을 성사시켰을 것이다. 경비원은 숙련노동이 아닌지라 언제든 대체가능한 업무로 여겨져 자주 무시당하고 수시로 해고의 위험에 놓여 있는 비정규직이다.

경비실 에어컨 논란에 '숨어 있는 역학(力學)’이 있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경비원 숫자를 줄이거나 근무시간을 단축하는 아파트 단지가 늘었다. 강남구 압구정동 한 아파트는 올초 경비원 100명을 전원 해고하고 경비원 28명과 관리원 70명을 새로 뽑았다.

경비원들이 진땀을 흘리는 것은 폭염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기 때문이다. 에어컨 설치를 미루고 있는 한 아파트 주민대표의 말을 들어보자. “입주자대표 회의는 장기발전계획을 수립하고 있는데, 첫째가 무인경비시스템 도입입니다. 매년 경비용역에만 십수억원이 들어, 최근 지어진 아파트처럼 경비시스템 현대화를 계획 중입니다. 그렇게 될 경우, 에어컨을 설치한 뒤 바로 떼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기에 미루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폭염 아파트의 ‘착한 에어컨’을 칭찬하고 있는 동안, 경비원들을 순식간에 증발시킬 저 기계의 효율화가 ‘염치’ 따윈 아랑곳 않고 아파트 뒤쪽에서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는지 모른다.

                    이상국 아주닷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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