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란 국호는 언제 어떻게 지어졌을까. 2009년 여름 소설가 김진명은 '천년의 금서'라는 소설로 상당한 독자의 공명을 불러일으켰다. 이 소설은, 대한민국 국호의 비밀을 파헤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가 찾아낸 '한(韓)'이란 명칭은, 3천년 전 중국 시경에 등장하는 인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설 공간이니 사실 여부에 굳이 천착하기는 그렇고, 우리 겨레의 오랜 뿌리에 대한 자부심을 상상력으로 풀어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 고종, 대한(大韓)이란 이름을 역설하다
대한(大韓)이란 국호가 제정된 건 1897년 10월 고종이 소집한 어전회의에서였다. 조선 왕조 내내 유지됐던 중국과의 상하질서를 청산한 상황에서 새로운 국호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서울 소공동에 있는 원구단(圜丘壇)에서, 황제로 칭하는 것을 하늘에 알리는 천제를 앞두고, 고종은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는 국호를 선포하며 신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라는 옛 나라이나 천명을 새로 받았으니 이제 이름을 새로 정하는 것이 합당하다. 삼대(三代) 이래로 황제의 나라에서 이전의 나라 이름을 그대로 쓴 적이 없다. '조선'은 기자가 봉해졌을 때의 이름이니 당당한 제국의 이름으로 합당하지 않다. 대한이란 이름을 살펴보면 황제의 정통을 이은 나라에서 이런 이름을 쓴 적이 없다... 한(韓)이란 이름은 우리의 고유한 나라 이름이며, 우리나라는 고구려와 백제와 신라 등 원래의 삼한을 아우른 것이니 '큰 한'이라는 이름이 적합하다."(고종실록 권35, 광무원년 1897년 10월 11일조)
"지금 나라의 이름을 ‘대한’이라고 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고, 또한 매번 일찍이 보건대 여러 나라의 문헌에는 조선(朝鮮)이라고 하지 않고 ‘한’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전에 이미 ‘한’으로 될 징표가 있어 오늘이 있기를 기다린 것이니, 세상에 공포하지 않아도 세상에서는 모두 다 ‘대한’이라는 이름을 알 것이다.“ (고종실록 권36, 광무원년 1897년 10월 11일조)
# '대한'에 담긴 의미는 자주성-자존감-통합성
이 자리에서 '조선'이란 국호의 유지론도 등장했고, '고려'라는 명칭들이 우리나라를 대표한다는 주장도 나왔지만, 군주의 직권으로 '대한'이 정식 국호가 됐다. '왕정'을 기본으로 하는 대한이란 나라였기에 대한제국(帝國)이 되었다.
고종은 왜 고려나 조선이란 이름을 물리치고 '대한'을 국호로 정했을까. 여러 가지 분석 중에 눈에 띄는 것은, '대(大)'라는 수식어가 의미하는 자존감과 통합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다. 한(韓)이란 이름은, 지역색을 이미 띠고 있는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고려를 비롯해, 중국적 시선이 담긴 조선을 극복하는 명칭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3한(韓)을 아우르는 '대한'은 바로 우리 겨레 전체를 고루 지칭하는 데 합당하다고 보았을 것이다. 3한이 한반도의 남쪽에 위치했던 나라들만을 가리켜 ‘대표성’이 부족하지 않으냐는 반론을 의식해 고종은 굳이 고구려 백제 신라를 3한으로 지칭하며 전체를 아우를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이란 책에서 '대한'을 이렇게 설명한다.
"대한이라 함은 한(韓)은 한이지만 옛날 같은 작은 한이 아니라 지금은 커다란 한이라는 뜻을 보인 것이다. 이렇게 '대한'이란 것은 두 자가 다 합하여 나라 이름이 되는 것이요, 결코 대명(大明, 명나라)이나 대영(大英, 대영 제국)과 같이 높이는 뜻으로 대자를 붙인 것이 아니며 '한국' 이라 함은 실제 대한을 간단하게 부르는 것이다."
# 25세 신석우가 '대한민국'을 주창하다
국호가 다시 거론되는 건, 1919년 4월 10일 상하이에서 출범한 임시의정원이 임시헌장을 만들 때였다. 이때 임시의정원 29명은 격론을 펼친 것으로 돼 있다. '대한민국'을 쓰자고 한 사람은 25세의 신석우였다. 반론이 쏟아졌다. 고종 어전회의에서 나왔던, 조선과 고려가 다시 거명된다. '대한'은 망한 국가이므로 계속 쓰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주장(여운형)도 나왔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빼앗긴 것일 뿐, 우리가 국호를 다시 찾는 것이 나라를 찾는 것이므로 '대한'을 유지하는 게 좋다(신석우)는 의견이 힘을 얻었다. 여기에 제국 대신 '민국'을 붙이자는 의견도 신석우가 냈다. 중국이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이라고 쓰고 있는 것을 참고했다고 하며, 민주공화국을 의미하는 명칭으로 적합하다는 의정원들의 공감을 받았다.
신석우(申錫雨, 1894-1953)는 어떤 인물인가. 일본 와세다대학 전문부를 졸업한 뒤 상하이로 건너가 여운형과 함께 고려교민친목회를 조직했고 '우리들(我等)의 소식'이란 신문을 발간했다. 1919년 임시정부 출범 뒤엔 교통총장을 맡았다. 1924년 큰 부자이던 부친을 설득해서 경영난에 시달리던 조선일보를 송병준으로부터 8만5천원에 인수한다. (신석우는 현재 가치로 8억원이 넘는 승용차를 몰고다니던 금수저였다고 한다.) 그는 월남 이상재를 사장으로 추대하고 이 신문을 혁신해 민족지로 키웠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친일 인명사전에 들어가 있는 일제 때 전북지역의 갑부로 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신석우(1869-1942)와는 다른 인물이다.
# 국호가 다른 독립운동 세력을 소외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 조봉암
1948년 5월 31일, 해방 이후 헌법을 만드는 제헌국회가 개원했다. 이승만은 국회 개원식 식사(式辭)에 '대한민국 30년'을 헤드라인으로 달았다. 그가 이끄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당시 촉성국민회와 함께 양대 축이었던 한국민주당이 반론을 펴며 '고려'로 하자고 했다.
우파의 중심이었던 한국민주당이 '고려'를 내세운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국호 논쟁에서 좌파는 '조선', 우파는 '대한', 그리고 중도파가 '고려'를 주장하는 구도였기 때문이었다. 한국민주당의 고려 지지에는 지도자 김성수의 의견이 숨어있었다. 그는 '고려대'란 교명을 지은 사람이다.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자, 헌법기초위원회는 표결로 정하기로 한다. 투표 결과, 대한민국 17표, 고려공화국 7표, 조선공화국 2표, 한국이 1표로 나왔다.
헌법안이 본회의에 상정됐을 때, 조봉암은 '대한민국' 국호에 대한 반론을 펴면서 임시정부의 국호를 계승하는 것은, 임정의 테두리 밖에서 독립운동을 한 세력을 소외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새 나라를 건설함에 있어서는 바다 안과 바다 밖 수백만 애국동포와 선열의 혁명적 투쟁 전통과 정신을 계승해야지, 어떤 명의를 답습함이 목적도 아니고 본의도 아니다"라고 역설했다.
# 이승만은 왜 '대한민국'을 밀어붙였나
국회의장 이승만은 7월 1일 헌법안 독회를 다시 시작하면서 "국호가 잘 되지 않아서 독립이 안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3·1 운동으로 수립된 임시정부의 국호대로 대한민국으로 정하기로 하고 국호개정 토론으로 시간을 낭비함으로써 헌법 통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합시다"라고 설득했다. 축조심의 끝에 이뤄진 국호 표결에서 대한민국이 찬성 163, 반대 2표로 확정된다. 이승만이 '대한민국'이란 이름을 밀어붙인 까닭은 뭘까.
3·1 운동 이후, 우리 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진다. 4월 10일 상하이에서는 임시의정원이 창설되고, 전국 지역구 의원 29명을 뽑고 이튿날인 11일 임시정부 각료를 선출한다. 초대의정원 의장은 이동녕이었다. 4월 23일 국내 독립운동가들은 한성정부를 수립한다. 13도 대표를 뽑고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하는 정부를 선언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3월 17일 대한국민의회가 생겼다. 1917년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받아 한인들이 만든 전로한족회중앙총회(全露韓族會中央總會)를 만들었는데, 이를 기반으로 개편된 것이 대한국민의회였다. 의장은 문창범, 대통령은 손병희, 국무총리는 이승만을 추대했다.
경성과 상하이와 블라디보스토크에 흩어져 있는 '임시정부 조직'들(멤버들이 상당수 겹쳐있기도 했다)이 항일투쟁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통합을 논의하기 시작한다. 정통성과 기틀은 국내 한성정부로 하고 위치와 국명은 '상해임시정부'로 한다는 합의가 이뤄졌고, 9월 11일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한다. 임시정부라는 명칭을 쓴 것은 상해임시정부뿐이며, 그들은 모두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썼다. 통합된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었다. 그는 상하이에서는 6개월 정도 밖에 활동하지 않았으며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를 맡은 안창호가 임정의 주된 활동을 이끌었다. 그랬지만, 해방 이후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첫 수반을 맡았던 '상징성'을 스스로의 정치적 반석으로 삼으려 했다. 그랬기에 임시정부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유지하는 것이 스스로의 정통성을 얻는 길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 새한민국 · 대한동화국 · 한나라?
대한민국 국호에 대한 거센 반론이 등장하자 이승만은 향후 이 문제를 재론할 것을 약속하기도 했다.(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때 나온 국호 관련 아이디어에는 인상적인 게 많았다. 명칭들은 저마다 명분과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기도 했다. 대한보다 태한이 어떠냐는 주장도 나왔고, 한나라로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대한동화국으로 하자는 말도 있었고 새나라이니만큼 새한민국으로 하는 게 어떠냐는 의견도 있었다.
대한민국을 정식국호로 못박은 것은, 1960년 1월 16일 국무원 고시다. 약칭은 대한이나 한국을 쓸 수 있지만 북한정권과의 구별을 위해 '조선'이란 명칭은 쓰지 못한다고 밝혔다. 이후에도 국호에 대한 논란은 있어왔지만, 대한민국은 이제 우리나라의 대표 브랜드로 정착했다. 2002년 월드컵 때는 국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가며 감동을 길어올렸던 애국의 키워드이기도 했다.
이상국 아주닷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