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16일 남북 고위급회담을 돌연 취소하자 여권은 기세가 한 풀 꺾인 듯하다. 추미애 민주당 대표는 “정확한 상황이 확인되기까지 (야당은) 억측을 자제해 달라”고 톤을 낮췄다. 야당은 다시 공세의 끈을 죄는 모양새다. 유승민 바른미래당 공동대표는 “판문점 선언 하나로 핵도 사라지고 평화가 온 것처럼 무장해제하는 것은 결코 정상이 아니다”고 꼬집었다. 김정은이 이번엔 자유한국당 손을 들어줬다는 말도 나온다.
대외정책을 위한 협상을 양면게임이론(Two-level game theory)으로 설명한 사람은 하버드대학의 퍼트남(Robert D. Putnam) 교수다. 협상이 성공하려면 상대국(상대방)과의 합의도 중요하지만 그 합의가 국내 유권자들로부터 비준(동의)을 받을 수 있는 합의여야 한다는 것이다. 국제적·국내적으로 모두 합의가 가능한 '하나의 세트로서의 합의(win-set)'라야 한다는 얘기다. 판문점 선언에 대한 국회비준 문제로 여야가 맞서 있는 우리에겐 시사하는 바가 많다.
대외정책의 수립과 이행에 있어서 국내 변수의 중요성은 늘 강조돼 왔다. 외교정책이 과거엔 국가 간의 힘의 위계에 따라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이른바 외부-내부(outside-in) 접근의 결과였다면, 탈냉전이 시작된 1970년대 이후엔 사회적 요구의 증가 등으로 인해 내부-외부(in-outside) 접근으로 바뀌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우리처럼 국민의 동의와 수용 여부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대북정책 모색이 바로 그런 경우라 하겠다.
그렇다면 문재인 정권은 이 부분에 대해서도 충분히 주의를 기울였을까. ‘그렇다’고 답하기 어렵다. 물론 문 대통령의 대북정책 지지율은 국정수행 평가조사에서 83%(한국갤럽)가 나올 정도로 높다. 그러나 이 문제는 지지율과는 별개다. 야당부터가 짙은 소외감을 느끼고 있는 게 현실이다. 지지율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매사가 자신의 의지대로만 가는 것도 아니다. 고위급회담 취소와 같은 일이 또 생기면 여론은 순식간에 돌아선다.
대통령의 한반도 평화 이니셔티브가 자기들만의 잔치라는 얘기가 나오지 않도록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한다. 역시 배려가 약(藥)이다. 평창올림픽 때 민주당 소속인 최문순 강원지사가 설을 맞아 강릉의 한 호텔에서 북한 응원단과 기자단 250여명에게 떡국을 대접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저런 행사 하나쯤은 간청을 해서라도 야당에 맡겼으면 좋을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큰일을 하다 보면 이런 일들은 널려 있다. 대통령이 야당 대표를 청와대로 불러 밥 한 끼 먹는다고 다가 아니다. 늘 마음을 열고 반대편 사람들까지도 끌어들여야 한다.
야당도 문제가 많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자유한국당의 홍준표 대표는 판문점 선언을 “남북이 합작한 위장 평화공세 쇼”라고 일축한다. 그러나 이게 그렇게 단순한 사안인가. 칼로 무 자르듯 ‘위장 쇼’라고 규정해 버리는 순간 더 이상의 논의는 불가능해진다. 생산적인 논의는 물론이고 야당 입장에선 효과적이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좋은 소재마저 잃어버리게 된다. 이성적 판단과 전략이 결여된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대응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거듭 확인한 건 우리 내부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다. 판문점에서 두 정상이 도보다리를 걷고 둘이서만 머리를 맞댔을 때 일부 진보 인사들과 매체가 보여준 득의만면(得意滿面)하고 의기양양(意氣揚揚)해 하던 표정은 그 상상력과 담대함 때문에 오래 기억될 듯싶다. 서울에서 신의주를 거쳐 베이징까지 고속철도(KTX)가 놓이고, 학생들은 여름이면 개마고원으로 수학여행을 가게 되는 날이 당장에라도 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북한의 고위급회담 취소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더없이 좋은 예방주사다. 북을 다룬다는 게 그리 만만한 게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닫게 해준 고마운 주사다. 비핵화 협상이라는 험난한 여정을 앞두고 안 맞았더라면 크게 후회했을 뻔했다. 북은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 명의의 고위급회담 취소 담화에서 한·미 양국에 대한 섭섭함과 분노를 마구 쏟아냈다. 속은 시원했을지 몰라도 구절구절에서 그들이 뭘 원하고, 뭘 두려워하는지가 영상처럼 선명하게 드러난다. 홧김에 저지른 실수겠지만 이 또한 망외의 소득이다. 예방접종과 함께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