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 컬럼] 중국 최고(最古)의 조선족 마을

2018-05-0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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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베이성 친황다오 칭룽현 타거우촌 박씨네 마을

청 나라때 조선 포로 후손들

길. 오는 길과 가는 길은 원래 쌍방통행이 자유로운 한 길이다. 그러나 실제와는 달리 관념의 눈은 종종 같은 길을 서로 다른 길로, 또는 일방통행만 가능한 길로 잘못 보는 착시현상을 일으킨다.

한반도와 중국 대륙을 잇는 길은 예나 지금이나 그게 물길이든 뭍길이든 쌍방통행이다. 그 길은 한때 막히면 막혔지 한쪽에서 다른 한쪽만 갈 수 있었던 일방통행이었던 적은 없었다. 오랜 옛날부터 대륙의 여러 민족과 그들의 문물이 한반도로 이주해왔듯, 한민족과 그들의 문명도 중국 대륙으로 건너가 빛을 줬다. 그래서 한·중 교류사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내 안에 그대가 있고, 그대 안에 내가 있네(我中有你, 你中有我)'라고 하지 않던가.

중국 조선족은 한민족이지만 국적은 중국이다. 따라서 중국 조선족은 한국인이 아닌 중화인민공화국 국민이자 중국인이다.

중국 조선족은 대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쳐 한반도에서 주로 중국 동북지역(만주)으로 이주해온 한민족과 그 후예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옛날, 중국으로 건너가 살아온 한민족은 없었을까? 엄동설한, 북풍한설의 만주지방 말고 만리장성 이남지역, 즉 따뜻한 남쪽나라로 이주해온 한민족은 없었을까?

필자는 잘 알려진 것, 많이 논의되어온 것보다는 새로운 것과 잊혀진 것을 사랑한다. 19세기 후반 이후 조선족에 대해서는 선배 학자들의 거작들이 참 많다. 그보다 더 옛날 우리 민족의 중국대륙으로 이주에 대해 알고 싶지 않은 이들에게는 이 글을 더 이상 읽는 것은 시간과 정력 낭비가 아닐 성 싶다.

중국 역대 사료들은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한민족들의 사적을 꼼꼼히 적고 있다. 19세기 이전 중국으로 이민간 한민족들은 거의 한족, 몽골족, 만주족 및 기타 민족에 의해 동화·흡수됐다. 그들의 흔적은 문헌이나 족보, 그리고 일부 후대들의 의식 가운데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아련한 추억의 빈 벌판 한 가운데의 볏짚단마냥 웅크리고 있는 곳이 하나 있다. 중국 최고(最古)의 조선족 마을이다. 지금의 허베이(河北)성 친황다오(秦皇島)시 칭룽(靑龍)현 타거우(塔溝)촌에, 대부분 박(朴) 아무개로 불리는, 약 350여 명의 조선족이 살고 있다. 참고로 현재 약 3000여 개의 한족(漢族) 성씨 중 박(朴)씨는 없다. 즉, 예나 지금이나 중국에서 박(朴)씨 성을 사용하는 사람은 한국인과 조선족 뿐이다.

16세기 말엽, 중국 만주지역에 거주하던 여진인 사이에는 통일을 주도하는 전쟁이 발발했다. 건주야인(建州野人)의 수령 누르하치는 30년 전쟁을 거쳐 여진 각 부를 통일하고 1616년에 후금국을 건립했다. 누르하치가 두만강 유역의 여진인 각 부를 정복할 때 가끔 조선 변경을 침범해 주민들을 납치해갔는데, 납치된 사람들 중의 일부는 8기군 군졸로 충당되고 다른 일부는 장전의 장정으로 안치되었다. '조선실록 광해군일기'에도 만주인이 변경을 침입하고 조선인을 납치해간 기록이 자주 보인다.

누르하치가 1619년(광해군 11년) 명 나라 변경을 침략하자, 명 나라에서는 조선에 구원병을 청했다. 처음 광해군은 응하지 않다가 마지못해, 강홍립을 도원수, 김경서를 부원수로 삼아 1만 여명의 구원병을 보냈다. 조선 군대는 콴뎬(寬甸)에서 명나라 군대와 합류해, 지금의 라오청(老城) 60리 지점에서 누루하치 군대와 회전했으나, 명 나라 군대는 대패하고 조선군도 포위됐다. 강홍립은 조선군의 출정이 본의가 아니었음을 알린 뒤, 후금에게 항복했다. 그의 항복은 출정 전에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는 광해군의 당부에 따른 것이다. 따라서 명․후금의 세력교체기 때 이러한 양면외교 정책으로 광해군 때에는 외침의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조 때는 이를 이용하지 못하고 병자호란을 맞닥뜨렸다.

강홍립의 항복군 중 일부만 조선으로 돌아갔고 대부분 모두 누루하치의 포로로 남고 말았다. 1627년 정묘호란과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이보다 더 많은 조선인들이 납치됐다. 중국측 문헌 '심양일기(沈陽日記)'의 정축년 음력 5월 17일의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에서 납치한 포로를 송환시킬 때 수만 명에 달했다는 기록만 보더라도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이 잡혀왔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허베이성 칭룽현 타거우촌 거주 조선족의 조상도 청 나라 조선 포로들이다. 1644년 청 나라가 명 나라를 멸했을 때 청 나라 군대에 끌려 산해관을 넘어 만리장성 남쪽으로 들어와서 오늘날까지 그곳에 눌러앉은 것이다. 박씨 마을 주민들은 언어, 생활, 습관 등 모든 면에서 한족화되었지만 조선인이라는 민족의식만은 용케 살아 있었다. 조선족으로 끝까지 남기 바라는 마을 주민들의 일치된 희망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정부는 1951년 그들을 중국 조선족으로 인정했다.

미국 시민권인 그린카드를 수십 장 따내고도 또 남을 그 장구한 세월, 400년을 중국 땅에서 살아온 박씨네 마을사람들. 이제 그만 다수민족인 한족으로 융합해 살면 여러 모로 이득이 많고 편리한 점도 많을 텐데도 자진해서 소수민족 조선족으로 남았다. 왜? 무엇 때문에? 콧잔등이 찡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칭룽현을 흐르는 칭룽하(왼쪽), 칭룽현 타거우촌 중국 최고(最古) 조선족 박씨들이 거주하고 있다. [사진=바이두, 강효백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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