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90] 준가르 제국은 어떻게 사라지나? ②

2018-03-12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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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준가르, 할하지역 공격 재개
1,727년, 후계자 다툼 속에 독살된 체왕 랍탄의 자리를 이은 인물은 첫 번째 부인의 아들 갈단 체링이었다. 계모를 아버지를 죽은 범인으로 몰아 처형하고 기반을 굳힌 이 인물은 서쪽으로의 정복전쟁을 계속하면서 동쪽으로의 진출도 노렸다. 처음부터 청나라에 대한 적대감을 나타냈던 그는 옹정제 9년인 1,731년, 청의 지배 아래로 들어간 막북의 몽골 고원을 공격했다.
 

[사진 = 에르데니 주 사원]

청나라는 이 사태를 중시해서 청나라와 할하의 연합군을 출동시켜 준가르의 침입을 물리쳤다. 이듬해 준가르군은 카라코룸의 에르데니 주 사원에 집결했다. 이때는 할하의 병력 2만 명이 출동해 준가르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결과는 준가르군이 만여 명의 사상자를 낸 뒤 패주했다. 준가르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할하의 지도자들은 청나라로부터 포상과 함께 여러 가지 칭호를 받았다.

이후 6년에 걸친 강화교섭을 거쳐서 할하와 준가르를 가르는 국경선이 1,739년 확정됐다. 이때는 옹정제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건륭제가 즉위해 있던 때였다. 항가이 산맥의 동쪽은 할하가 차지하고 서쪽은 준가르가 차지한다는 암묵적인 휴전이 이루어 진 것이다. 이에 따라 양편사이의 평화가 1,745년까지 유지됐다.

▶ 중앙아시아 패권 장악

[사진 = 카자흐 초원의 겨울]

동쪽을 안정시킨 갈단 체링은 이후 서쪽 카자흐 지역 초원 정벌에 매달렸다. 그 결과 1,716년에서 1,719년 사이 카자흐의 일부는 러시아에 보호를 요청했다.
 

[사진 = 카자흐인들]

이것이 카자흐가 나중에 러시아에 복속되는 시발점이었다. 갈단 체링은 타쉬겐트와 투르게스탄 등 중앙아시아 여러 지역을 장악하면서 그 지역의 패자(覇者)로서 지배권을 확보했다. 준가르군은 정복한 지역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인질 제도를 활용했다.

정복한 지역에서 인질을 데리고 철수한 뒤 공납을 제공받는 방법이었다. 러시아어에 인질을 의미하는 아마나트(аманат)라는 말이 있다. 아라비아 말에서 파생된 이 말은 러시아가 이슬람 문화권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들어온 인질 제도를 활용해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유목민을 통치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면서 생겨난 말이다.

당시 준가르는 점령지였던 부하라 상인들을 이용해 러시아, 중국과 활발한 교역 활동을 가졌다. 그러한 교류 과정에서 준가르의 인질제도가 러시아에게 참고가 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여하튼 갈단 체링 시대에 준가르는 가장 안정된 번영을 구가했다.

▶ 갈단 체링 死後 내분 격화
1,745년 준가르의 지도자 갈단 체링이 죽었다. 능력 있는 군주가 죽은 뒤 후계자 정리가 제대로 되지 못하면 나라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 예가 많았다. 갈단 체링이 죽은 뒤의 준가르도 바로 그 경우에 해당한다. 혼란의 상황이 거듭되는 동안 준가르에 통합돼 있던 오이라트의 부족들도 제 각기 갈 길을 가겠다고 나서면서 분열의 현상까지 나타났다.

도르베트, 호쇼트, 호이트 등 각 부족이 독립의 길을 찾아 나서면서 준가르도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각 부족의 많은 수령들 가운데 아예 청나라에 투항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1,753년 도르베트 부족 3천명이 청나라에 투항했다. 이듬해인 1,754년, 아무르사나라는 인물이 5천 명의 병사와 2만 명의 주민을 이끌고 청나라로 투항해 보호를 요청했다.
 

[사진 = 다와치]

이 아무르사나라는 인물은 갈단에 이어 준가르를 지배한 체왕 랍탄의 외손자였다. 그는 다와치라는 인물을 지원해 홍타이지 자리에 오르게 만들었다. 그래서 혼란했던 내부 권력 투쟁은 다와치로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다와치는 체왕 랍탄의 사촌형제의 손자였다. 계보로 보면 준가르의 홍타이지 자리를 차지할 자격이 없었지만 아무르사나 덕분에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아무르사나가 일리지역에 머물면서 군주처럼 행세하자 둘 사이에 불화가 생겨 한판 대결이 벌어졌다. 그 결과 패배한 아무르사나가 청나라에 투항한 것이다.

▶ 준가르 제국의 멸망

[사진 = 피서산장(열하)]

당시 청나라는 옹정제의 뒤를 이은 건륭제가 즉위한 지 19년이 되던 때였다. 건륭제는 열하의 피서산장에서 그를 정중히 대접했다. 건륭제로서는 이제 할아버지 강희제 때부터 골칫거리였던 준가르를 끝장낼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5만 명의 군사가 동원된 원정군이 일리를 향해 떠났다.

아무르사나는 북로군부장군이라는 직책으로 원정군의 길잡이 역할을 했다. 청나라군대는 북로군과 남로군으로 나뉘어 접근했다. 북로군은 몽골 초원을 거쳐 일리로, 남로군은 우루무치와 준가르 분지를 지나 일리로 향했다. 청나라 군대가 진군해 가는 동안 저항은 거의 없는 대신 준가르로부터 투항자가 속출했다.
 

[사진 = 건륭제]

그래서 원정군이 일리까지 도착하는데 거칠 것이 별로 없었다. 준가르를 무너뜨리고 그 군주까지 붙잡은 건륭제는 다와치에게 여자까지 짝 지워 줘 북경에서 살게 했지만 다와치는 얼마 후 병으로 죽었다. 이로서 준가르 제국은 사실상 멸망했다. 몽골의 서부에서 백년 이상동안 사실상 내륙아시아의 주인 노릇을 해온 준가르 제국은 결국 할하가 청나라에게 복속 된 지 60여 년 만에 결국 청나라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 무위로 끝난 아무르사나의 반발

[사진 = 청군의 준가르 정벌(동판화)]

청나라는 준가르를 해체시켜 부족별로 개별 칸을 지명했다. 아무르사나도 호이트부의 칸으로 임명됐다. 하지만 자신이 전체 준가르의 칸이 될 것으로 기대했던 아무르사나는 크게 실망했다.
 

[사진 = 청나라군 대포]

그래서 청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한동안 일리 지역 근처에서 청나라군을 괴롭히며 활동하던 아무르사나는 결국 출동한 청나라 대군에 밀려 카자흐로 달아났다. 여기서도 쫓기는 신세가 된 그는 시베리아 지역으로 달아났다가 그 곳에서 35살의 나이로 병사했다.
 

[사진 = 청나라의 영토 확장]

이로서 일리지역(이리분지:伊犁盆地)은 청나라의 소유가 됐다. 청나라는 아무르사나의 사체를 인도해 줄 것을 러시아 측에 요구했지만 러시아는 청나라 관리의 입회아래 사체를 매장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 준가르의 멸망
준가르의 멸망! 그 것은 어떻게 보면 몽골 역사에 또 하나의 마침표가 찍어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칭기스칸 이전에 몽골 고원을 지배했던 종족들을 제외하고 생각한다면 제한적으로 몽골의 역사는 몽골족이 흥안령 일대에서 몽골 고원으로 진입한 때부터 시작된다고도 볼 수 있다. 그 시대 오이라트는 적어도 몽골 역사의 주역은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사진 = 건륭제 서부정복 축하연(자금성, 자광각)]

하지만 그들은 몽골 역사의 주역들이 무너져 내린 뒤 뒤늦게 또 다른 주역으로 등장해 1세기 이상 내륙 아시아의 역사를 주도해 왔다. 그런 점에서 유목민의 특성을 그대로 간직했던 그들은 어쩌면 마지막 몽골의 통합을 기대할 수 있었던 유일한 세력이었는지 모른다. 그들의 멸망으로 몽골 고원을 비롯한 주변은 청나라와 러시아의 지배권 안으로 편입됐고 더 이상 몽골 통합의 꿈을 기대할 수 없게 됐다.

그리고 몽골인들에게는 청과 러시아에 의한 길고 긴 예속의 세월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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