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160] 오이라트人은 왜 칸이 되지 못했나?

2018-02-01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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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死後 14년 만에 이루어질 동몽골 붕괴
영락제가 시도했던 차도살인계(借刀殺人計), 즉 남의 손을 빌어 적을 제거하려던 계획은 그가 죽은 14년 후에 이루어진다. 그 때 토곤 테무르가 동몽골의 지도부를 완전 와해시키고 몽골 전체를 손에 넣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락제의 원정이 가져온 후유증은 자신의 죽음 뿐 아니라 명나라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계속된 대규모의 원정은 국가 재정을 거의 바닥나게 만들었다.

자금성 건설에 이어 전쟁에 대거 동원됨으로써 백성들이 겪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때문에 영락제가 죽은 뒤 뒤를 이은 명나라의 황제들은 더 이상 몽골 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으려고 했다.
▶공세 막으려 만리장성 재증축

[사진 = 만리장성 가욕관]

몽골제국시대에는 유목 사회와 정주사회를 가르는 만리장성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몽골이 북쪽으로 밀려가 잠시 혼란에 쌓였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대규모의 원정을 통해서도 몽골을 제압하지 못하고 오히려 몽골로부터 간헐적인 공세를 당하게 되자 명나라가 겁을 먹은 것이 분명했다.
 

[사진 = 만리장성]

그래서 몽골과 중국을 가르는 대규모의 장벽이 다시 등장하게 된다. 지금 우리가 보는 중국의 만리장성은 대부분 바로 이때 증축된 것이다. 만리장성은 원래의 목적대로 방어선이 됐고 이제 때때로 그 성을 넘나들며 명나라를 괴롭히는 것은 오이라트를 포함한 몽골의 군대였다.

▶몽골 장악한 오이라트

[사진 = 에센 타이시]

영락제가 죽으면서 만리장성 너머로 물러난 명나라는 더 이상 몽골 초원의 패권 다툼에 변수가 되지 못했다. 한동안 몽골 내부에서는 권력 장악을 위한 자신들끼리의 드라마가 펼쳐진다. 이 때 중심인물은 오이라트의 태사(太師) 토곤과 그의 아들 에센이었다. 이들 부자(夫子) 시대에 오이라트는 몽골 초원의 패자(覇者)가 된다. 즉 토곤과 에센 부자시대에 오이라트가 몽골 초원을 사실상 장악했다고 이해하면 된다.

1431년 토곤은 동몽골에 대한 공격을 감행해 케룰렌강 유역을 빼앗았다. 몽골 동쪽 깊숙한 곳까지 서몽골인 오이라트가 지배력을 장악한 것이다. 토곤은 이에 앞서 중국의 명나라 감숙 지방에 있던 톡토아 부카(Toghtoa Bukha)를 불러들여 칸으로 추대했다. 그래서 5년 동안 두 명의 칸이 존재하는 상황이 됐다. 쿠빌라이 가문 출신으로 알려진 이 인물은 사실상 토곤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허수아비 칸이었다.
 

[사진 = 아다이 칸]

1428년 톡토아 부카가 당시 동몽골의 칸이었던 아다이(Adai)를 살해했다. 칭기스칸 가문의 인물이 같은 가문의 아다이칸을 제거하면서 이제 全몽골 고원을 손에 넣게 된 것은 오이라트였다.
 

[사진 = 타이슨 칸]

아다이가 죽은 뒤 토곤은 톡토아 부카에게 타이슨 대칸이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동몽골 붕괴 반긴 명나라
오이라트의 몽골 장악은 명나라로서도 반가운 일이었다. 자신들이 두려워했던 칭기스칸 가문이 무너졌으니 이들이 자축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후 중국대륙과의 대결에서 전면에 나서는 서몽골이 새롭게 등장했다. 하지만 명나라는 새로 등장한 세력을 과소평가했다. 그들은 명나라가 두려움을 가질만한 화려한 과거도 지니고 있지 않았던 신흥세력이었다.

물론 칭기스칸 가문과는 비교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명나라는 곧 이어 오이라트 공격으로 황제까지 포로로 붙잡히는 큰 고초를 겪게 되지만 이때까지의 분위기는 그랬다. 토곤은 몽골 초원을 장악한 뒤 그 세력권을 넓혀가기 시작한다.

▶몽골제국 연상시킨 영토 확장

[사진 = 투르판 유전지대]

오이라트의 영역을 넓히는 작업은 토곤의 아들 에센시대에 들어 더욱 야심차게 펼쳐진다. 1439년 토곤이 죽은 뒤 뒤를 이어 태사의 자리에 오른 에센은 아버지가 착수한 차가타이계 영토에 대한 공략에 박차를 가해 일리와 투르판, 하미 지역을 손에 넣게 된다.

[사진 = 신강위구르지역 천지]

현재의 신강위구르 자치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치가문의 킵차크한국에 대한 공략도 펼쳐 그 영토의 일부도 오이라트 세력권에 편입시켰다. 동쪽으로는 대흥안령산맥을 넘어 여진족까지 굴복시켰다. 에센시대 오이라트 영토는 서쪽으로는 발하쉬호수에서 바이칼호수까지, 동쪽으로는 만주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지역에 이르렀다. 과거 칭기스칸의 몽골제국을 연상하게 만들 정도였다.
 

[사진 = 감숙성 토성]

감숙성 지역 중국과의 국경선에는 감숙행중서성(甘肅行中書省)이 백여 년 만에 다시 설치됐다.

▶심판 받은 토곤의 야사
오이라트는 사라진 몽골제국을 자신들의 힘으로 부흥시켜보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몽골제국 시대의 관직명이나 전통을 되살리려고 노력 했다.칸의 자리까지 자신들이 차지하고 싶어 했지만 몽골의 주류인 몽골족의 입장에서 보면 칸의 자리까지 노린다는 것은 무리한 욕심이었다. 그들의 눈으로 보면 오이라트는 모반 세력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진 = 몽골의 궁사]

토곤과 관련해 전해 오는 야사가 후세 몽골인들의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전해지는 야사는 이렇다. 동몽골의 칸을 제거한 토곤이 칭기스칸의 오르도를 돌며 외쳤다 “당신이 칭기스칸이라면 나는 수타이(오이라트 조상 여신)의 후예 토곤이다.” 칼까지 휘두르며 무례한 행동을 하는 토곤을 주변 사람들이 충고했다.

"당신의 언행은 매우 좋지 않다. 주군님께 사죄하고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토곤은 이 충고를 듣지 않고 무시했다.
"나의 목숨을 누구에게 구걸하겠는가? 지금 全몽골은 나의 것이 됐다. 지난날 몽골 칸들이 했던 대로 나는 칸의 자리에 올랐다." 기고만장한 모습을 보인 토곤이 칭기스칸의 신전에 제물을 바치고 나오려는 순간 칭기스칸의 화살 통에서 갑자기 소리가 났다.

가까이 가보니 화살 통의 가운데 화살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 순간 토곤이 입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옷을 벗겨보니 화살이 관통한 상처가 나타났다. 다시 화살 통에 가서 보니 가운데 화살에 피가 묻어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토곤이 주군(칭기스칸)에게 불려간 것이라 했다. 토곤은 아들 에센을 불러서 유언을 남겼다. “남자인 칭기스칸은 자신의 남계(男系)를 만들어 냈다. 여자인 수타이는 보호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주군님에게 이렇게 당한 것이다.”

▶"오이라트인 칸 지칭은 逆天"

[사진 = 칭기스칸 기념비]

이 야사는 역사적인 사실과 차이가 있다. 토곤이 칸에 오른 적도 없고 아다이가 죽은 후 곧바로 죽지도 않았다는 점도 다르다. 이는 다분히 칭기스칸쪽 남계(男系) 자손이 아닌 오이라트의 수장이 몽골고원의 패권을 쥔 것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몽골인들의 정서와 오이라트가 멸망할 것이라는 기대가 반영돼 만들어진 얘기로 보여 진다.

앞서 언급한 대로 오이라트 부족은 칭기스칸 가문과 대대로 혼인관계를 맺었던 가문이었다. 즉 오이라트인 어머니에게서 난 자식이 몽골제국의 대칸 자리에 올랐지만 어머니 쪽의 피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버지에게서 이어 받은 뼈가 칭기스칸 가문을 잇는 것이지 어머니에게서 이은 받은 살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몽골인들은 오이라트 출신이 칸을 지칭하는 것은 역천(逆天), 즉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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