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삶과 꿈] 동북아 비극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가 되다

2018-01-20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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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일혁, 3남지구토벌사령관 최영희 장군과의 인연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남정옥(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학박사)=차일혁(車一赫) 경무관과 최영희 장군은 무인(武人)으로서 일맥상통한 점이 많이 있었다. 두 사람은 외형적으로 거의 180센티미터에 달하는 큰 키에다 무도(武道)로 단련된 건장한 체격을 지닌 전형적인 무골(武骨)들이었다. 체격만큼이나 나이도 비슷했다. 차일혁이 1920년생이고, 최영희가 1921년생으로 한 살 터울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성격이나 행동거지 그리고 배포와 전투지휘가 비슷했다. 치밀한 성격이 그랬고, 태산이 무너져도 눈썹하나 까닥하지 않을 커다란 배포가 그렇고, 전투 중 아무리 적(敵)이라고 해도 무분별한 살생을 하지 않은 것도 그렇고, 전투 중 진두에 서서 지휘하는 것도 그렇고, 부하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며 전투하는 것도 그렇고, 작전지역의 주민들에게 온정을 베푸는 것도 그렇고, 전투를 할 때는 부하들의 희생을 최소로 줄이면서 매번 승리를 거두는 것도 그랬다. 이른바 배포가 크면서 사려 깊은 호걸형 무장(武將)들이었다.

특히 차일혁과 최영희(崔榮喜) 장군은 모두가 인정하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그래서 그런지 두 사람은 유난히 인정미가 넘치며 다정다감했다. 두 사람은 전투 중 불교와 관련된 많은 일화를 지니고 있다. 차일혁은 전투 중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절대 사찰(寺刹)에 불을 지르지 않은 것으로 유명했다. 비록 작전에 차질이 생기더라도 절에 대해서만큼은 위해를 가하지 않았다. 빨치산들이 절에 은신해 있으면 그들이 나올 때를 기다려 공격했다.

그리고 몸에는 항상 염주를 지니고 다니며 전투 중 희생당한 부하들은 물론이고, 죽은 빨치산들에까지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불심(佛心)을 전하며 명복을 빌어줬다. 차일혁에게 있어 사찰은 그가 보호해야 될 의무이자 반드시 지켜야 할 신성한 곳이었다. 차일혁으로 인해 전란의 화마(火魔)로부터 살아남은 천년 고찰(古刹)만해도 부지기수(不知其數)다. 화엄사, 금산사, 천은사, 쌍계사, 선운사 등이 바로 그것이다. 차일혁은 그런 까닭으로 조계종 초대 종정(宗正) 효봉(曉峰) 스님으로부터 감사장을 받았고, 사후(死後)에는 국가로부터 대한민국 경찰관으로는 유일하게 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최영희 장군도 부처님을 잘 모신 덕분에 목숨을 건진 일화가 있다. 때는 1950년 9월 낙동강전선이 한창일 무렵이었다. 당시 제1사단 15연대장으로 있던 최영희 대령은 대구 북방의 가산산성(架山山城)을 탈취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대구의 위기를 수습하기 위해서였다. 가산산성을 공격하기 위해 무리한 행군을 했던 최영희의 제15연대가 가산산성 중턱에 있는 도선사라는 절에 도착했을 때, 연대 장병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런데다 공격을 앞두고 있던 제15연대 장병들은 신경이 매우 예민해져 있었다. 최영희 대령도 공격을 위해서 연대지휘소를 도선사 바로 밑에 설치해 놓고 공격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음날 병사들이 도선사 스님들을 모두 절에서 쫓아버렸다는 보고를 받았다. 까닭을 알아보니, “병사들이 전투준비를 하고나서 지친 몸으로 잠이 들려고 하는 새벽 3시부터 도선사 스님들이 일어나 날이 밝을 때까지 북을 치며 불경을 외우는 바람에 밤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어 스님들을 내쫓았다.”고 했다. 깜짝 놀란 최영희 연대장은 병사들에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스님들을 절에서 내쫓으면 되겠느냐?”고 점잖게 타이르고, 스님들에게는 “죄송하지만 전투를 앞둔 병사들의 수면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너무 크게 소리 내지 말고, 독경도 새벽에 한 두 번만 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사진=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그리고 주지스님에게는 조심스럽게 “부하들의 무운장구와 혹시 내일 전투에서 죽을지도 모를 장병들을 위해서 새벽기도를 드리겠다.”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주지스님도 그러면 “새벽에 목욕재계(沐浴齋戒)한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오라.”며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최영희 연대장이 새벽기도를 마치고 날이 밝기 전 여명(黎明) 공격을 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분명 최영희 대령을 겨냥한 적탄이 날아오는데 계속 자신의 발밑에 떨어졌다. 그때 아침밥을 운반하던 노무자 한 사람이 다가오자, 깜짝 놀란 최영희 대령이 “적이 사격하니 엎드리라!”며 소리쳤다. 하지만 그 노무자는 이미 적탄에 맞아 쓰러진 상태였다. 연대 수색대원들이 즉각 주변을 수색해보니 근처 바위틈에 북한군 저격병이 숨어있었다. 최영희 연대장을 살해하기 위해 북한군이 보낸 저격병이었다. 저격병은 최영희의 수색대에 의해 사살됐다. 최영희는 위기위발의 상황에서 부처님의 가호(加護)로 극적으로 살아남게 됐다.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차일혁이 최영희 장군을 만난 것은 빨치산 토벌과 관계가 있었다. 1951년 4월 중순, 당시 국군8사단장으로 있던 최영희 준장이 ‘3남지구토벌사령관(三南地區討伐司令官)’이 되어 전주로 내려오면서부터였다. 당시 최영희 장군은 어마어마한 직책을 지니고 전주로 내려왔다. 6개 도(道)의 계엄사령관에다 3남지구토벌사령관을 겸하고 있었다. 여기서 6도(六道)라 함은 충청남북도, 전라남북도, 경상남북도를 말하고, 3남(三南)은 영남, 호남, 충남을 지칭했다. 막강한 권한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지역에서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영희 장군이 지휘하는 제8사단이 이곳으로 내려오게 된 것은 순전히 제11사단의 과오(過誤)때문이었다. 이제까지 빨치산토벌을 수행했던 최덕신(崔德新) 준장이 지휘하는 제11사단이 1951년 거창양민학살사건으로 여론이 들끓게 되자, 군에서는 제11사단을 동해안 전선으로 이동시키고 대신 제8사단을 토벌작전에 투입했다. 그렇게 해서 제8사단장이던 최영희 장군이 3남지구토벌사령관 겸 6도계엄사령관으로 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도 최영희 장군은 그런 티를 전연 내지 않았다. 최영희 장군은 나중에 회고했던 것처럼 “빨치산토벌작전 경험이 없던 자신으로서는 그저 배우는 입장에서 왔다.”고 했다. 겸손하기 이를 데 없는 태도였다.

그때부터 최영희 장군이 지휘하는 제8사단이 대한민국 후방지역의 토벌작전을 모두 관장하게 됐다. 차일혁이 지휘하는 전북도경의 제18전투경찰대대도 최영희 장군의 지휘를 받게 되면서 두 사람은 만났다. 이른바 군경합동작전(軍警合同作戰)을 앞둔 자연스런 만남이었다. 차일혁이 만난 최영희 장군의 첫 인상은 매우 호감이 갔다.

최영희 장군은 군경합동작전에 앞서 차일혁 부대를 방문했다. 그때 최영희 장군을 만난 차일혁은 그의 첫인상에 대해 “최영희 사단장은 거구(巨軀)에 인정미가 넘치는 군인”으로 높이 평가했다. 거기다 최영희 장군은 겸손하기까지 했다. 차일혁은 “제18전투경찰대대의 협조와 지도편달을 바란다는 최영희 장군의 말이 가식처럼 들리지 않았다.”고 했다. 차일혁이 봤을 때 이제까지 군 지휘관들은 경찰에 대해 통상 무리한 지시를 하곤 했는데, 최영희 장군은 예전의 그런 군 지휘관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은 마음이 통했다. 서로가 사나이다움을 느낀 것이다. 바로 의기투합(意氣投合)이었다.

차일혁은 그런 최영희 장군에게 “국군만으로는 빨치산토벌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면서 빨치산 토벌에 있어서 전투경찰이 차지하는 비중을 진중(鎭重)하게 설명했다. 차일혁은 계속해서 최영희 장군에게 “군인 통제 하에서 전투경찰이 일방적으로 군의 지휘를 받기보다는 경찰의 작전권을 보장해 주고 경찰의 의견을 작전에 반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솔직히 털어났다. 이제까지 어떤 전투경찰지휘관도 장성급 군 지휘관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경찰로서는 늘 하고 싶었으나 용기가 없어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그 때문인지 옆에 있던 전북 도경국장과 보안과장이 차일혁의 말을 듣고 사뭇 당황스러워했다. 누구도 감히 할 수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차일혁은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당당하게 말했다.

차일혁의 말을 들은 뭇시선들이 일제히 최영희 장군에게 쏠렸다. 최영희 장군의 반응이 궁금해서였다. 그런데 최영희 장군의 반응은 의외로 호의적이었다. 최영희 장군은 차일혁의 솔직한 의견에 흔쾌히 동조하면서, “차(車) 대장의 용맹에 대해서는 익히 들었으니, 사단 참모와 긴밀히 협조해 작전을 하라.”며 굳은 악수를 청했다. 계급을 생각하면 할 수 없는 사나이다운 태도가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해서 차일혁의 경찰부대와 국군 제8사단은 힘을 합쳐 빨치산이 들끓고 있는 정읍지역에 대한 본격적인 작전을 개시하게 됐다.

이번 군경합동작전에서 차일혁 부대는 정문산, 입암산, 쌍치 등지의 빨치산들을 추격하여 제8사단의 작전지역으로 몰아붙이는 것이었다. 그동안 경찰이 입수한 각종 정보를 분석한 결과 정읍의 빨치산들은 주변지역의 숱한 지방 공비들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어서, 어느 일부 지역만을 공격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비록 행정이 복구되었다고는 하나, 실제로는 치안부재에 가까운 상태였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다. 차일혁은 정읍으로의 출동에 앞서 이병희 사찰과장이 마련한 자료와 정읍경찰서 사찰계장이 마련한 자료를 자세히 검토하며 작전을 구상했다.

그 무렵 8사단에서 군경합동작전을 위한 회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제8사단장 최영희 장군, 지리산지구전투경찰대사령관 신상묵 경무관, 그리고 사단 참모 및 경찰간부들이 참석했다. 회의 분위기는 이전의 군경합동작전회의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이제까지 군경회의시에는 군 관계자들이 고압적인 자세로 경찰들에게 일방적인 지시를 내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날 회의는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회의 내내 최영희 사단장이 권위적인 자세를 버리고, 경찰에 협조적으로 대함으로써 원활한 의견 교환이 이루어졌다.

그렇게 시작된 제8사단과 차일혁 부대를 비롯한 군경합동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이 작전이 끝난 후 최영희 장군은 다시 전방의 전선으로 복귀하게 됐다. 그런 어느 날 최영희 장군이 차일혁을 찾아와 “나와 함께 군에 복귀하여 싸우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럽게 타진(打診)했다. 그만큼 최영희 장군은 군경합동작전을 통해 차일혁의 뛰어난 지략과 작전지휘능력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차일혁은 최영희 장군의 제의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차일혁은 자신의 명예를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 전북지역의 안정은 물론이고, 나아가 후방지역의 국민들이 전쟁의 상흔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안정된 삶을 되찾아주기 위해서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은 부하들과 약속했다. 절대로 자신의 명리(名利)를 위해서 부대를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한 바 있었다.

그 뒤 최영희 장군은 다시 지리산의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출정했다. 그때는 작전지역이 달라 차일혁은 최영희 장군을 만나지 못했다. 최영희 장군은 그 후 군에서 승승장구했다. 국방부장관 특별보좌관을 거쳐 국방부 제2국장,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 초대 5군단장, 제2군사령관, 제12대 육군참모총장, 제5대 합참의장을 거쳐 육군중장으로 예편했다.

전역 후에는 국방부장관과 국회 국방위원장으로 활약하며 대한민국의 거물(巨物)이 됐다. 특히 최영희 장군은 군에서 독특한 경력을 지니고 있다. 그는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 사단장, 군단장, 군사령관, 육군참모총장, 합참의장, 국방부장관까지 차례대로 역임한 대한민국 유일한 장군이었다. 아직까지 이 기록을 깬 장군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전무후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차일혁이 일찍 타계하지 않았더라면, 최영희 장군은 전투 중 신뢰하고 아꼈던 차일혁과 함께 의기투합하여 나라를 위해 보다 큰일을 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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