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공주들은 그렇다하더라도 그들이 고려로 출가해 올 때 따라온 많은 사속인(私屬人)들의 횡포도 만만치 않았다. 이들은 고려와 끈이 닿아 있는 부원세력과 결탁하기도 하고 고려 조정의 감시자 역할을 하는 등 폐해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고려 왕실에 가장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국정을 문란하게 한 집단은 몽골과 빈번한 교류 과정에서 생겨난 신진 부원세력(附元勢力)이었다.
이들은 몽골 세력을 등에 지고 왕위 계승문제나 정국 운영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들의 정치적 성장은 이후에도 계속돼 기황후 세력의 영향력은 고려왕위의 계승 문제에 영향을 줄 수 있을 정도로 강화됐다. 역관으로서 세도가가 된 것으로 앞서 소개했던 조인규의 평양 조씨 가문 역시 부원세력으로 꼽을 수 있다. 매를 길러 몽골에 바치는 응방(鷹坊)을 이용해 신진 세력이 된 칠원(漆原) 윤씨(尹氏) 가문도 여기에 속한다.
▶ 환관 일족도 부원세력 합류
"원나라 정치가 점차 문란해지면서 고자가 권세를 쓰게 되니 이들 중에서 어떤 자는 벼슬이 대사도(大司徒:호조상서)에 이르렀다. 그자들의 저택과 수레, 의복은 외람 되게 모두 재상의 격식을 차렸다. 딱지도 떨어지지 않은 고자 놈들이 우리나라를 멸시했다. 예를 들어 고용보 이삼진 등은 모두 짖는 개처럼 원나라 황제에게 참소해 우리나라를 모해했다. 말만해도 가슴 아픈 일이다." (고려사122 열전35 宦者總論)
역사의 기록에 깃들여 있는 울분을 감지해 봐도 그들의 횡포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 공민왕 들어 부원세력 척결
이들 부원세력의 일부는 아예 나라를 없애고 몽골의 직접 지배아래 두자는 이른바 입성론(入城論)을 일곱 차례나 들고 나서기도 했다. 입성론은 제기되는 시기마다 성격에서 약간씩 차이가 있다. 충숙왕 때 제기된 입성론은 고려왕에 대한 반대 운동으로 전개되기도 했다. 입성론의 요지는 고려국왕이 세습 직으로 맡았던 정동행성 승상 직을 임명직으로 바꿈으로써 왕의 위상을 약화시키자는 것이었다.
입성론은 결과적으로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왕을 비롯한 정치세력의 강력한 반대로 이들의 주장은 실현되지 못하면서 결국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몽골이 고려를 본격적으로 지배하던 시기는 이미 제국이 내리막길로 들어선 상황이어서 자국(自國) 사정도 복잡했다. 그런 상황에서 몽골로서도 구태여 고려를 직접 통치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1343년 제기된 마지막 입성론은 충혜왕의 폐위라는 나름대로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어쨌든 이들의 존재는 왕이 의욕을 가지고 추진하려던 개혁정치를 번번이 무산 시켰다. 개혁은 기득권을 가진 세력의 희생을 요구하는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예나 지금이나 기득권층의 반발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충선왕이나 충목왕의 각 분야에 걸친 개혁 시도는 결국 이들의 벽에 막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결국 이들 부원 세력의 제거와 개혁정치의 실현은 몽골의 힘이 약해지던 공민왕 때 들어서야 비로소 결실을 맺게 된다.
▶ 1세기 지배의 희생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일제가 36년 간 강점했던 세월의 후유증을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 고려 기반 흔든 인적․물적 수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