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猶什一弱制強(옛날에는 열에 하나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제어했으나)
近何盡是強食弱(요즘은 어찌해 온통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는가?)
변종운(卞鍾運) 「醉後放筆」 중
위 시의 배경은 19세기이다. 작자인 변종운은 역과(譯科) 중인 출신이며, 일생 동안 신분적 한계에 갈등하고 스스로 위로하기를 반복한 인물이다. 뛰어난 재능과 원대한 포부는 어쩌면 그의 일생에서 독이 되었을 수도 있다. 날개를 달고도 비상(飛翔)이 허락되지 않았으니 희망고문이나 진배없다.
지금에야 어디 그러할까. 하지만 사람들은 신분제라는 전통의 질곡을 벗어나자마자 현재의 무한경쟁에 던져져 또 다른 변종운들이 되어버렸다. 학술, 문화, 예술, 스포츠 등 각 방면에서 1등이 아니면 인정받지 못한다. 두각을 나타낸 이들 역시 괴롭기는 마찬가지이다. 매체의 집중 타깃이 되어 인간적 감동을 자아내는 그들의 노력 과정은 ‘결과’에 의해 과장되거나 퇴색되기 십상이다.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가 엘리트주의에 무젖어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지 모른다.
변종운은 비록 술이 얼근하게 올라 제멋대로 쓴 시라 변명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명징하게 세태를 짚어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잡아먹는다(强食弱).” 그가 붓을 놓은 지 2세기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소수의 강자와 다수의 약자 구도는 변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 씁쓸하다. 계급적 사유의 필요성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기란 전근대가 아닌 바로 지금이 아닌가 한다.
소수의 엘리트가 사회나 국가 전체, 대중을 이끌어 나간다는 사고는 계급사회에서 가장 환영받았던 공식이다. 10% 미만의 기득권을 손에 쥔다는 것은 가장 달콤고도 저열한 본능을 자극한다. 전통시대에는 교육과 이를 통한 지식 습득의 기회 자체가 기득권의 전유물이었다. 지금은 모두에게 열려진 기회이지만, 여전히 수많은 지방대학은 불행하고 고등학생들의 어깨는 처져 있다. 특히나 매년 공시되는 대학의 서열화는 모든 공(公)·사(私)교육 현장에 엘리트주의를 재촉해 아예 '대놓고 경쟁하자'고 말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는 배제된 채 가시적인 성과를 향해 모두가 한 줄로 달려간다. 때문에 변종운의 이 말들이 일침이 되어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올 겨울 천재지변과 '불수능'에 유난히도 심신이 지쳐 있을 젊은 친구들이 떠오른다. 이들이 짊어지고 갈 더 나은 미래는 과연 무한 경쟁 속에서만 창출되어야 하는 것일까?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회의(懷疑)가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