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에 호의적인 쿠빌라이
몽골의 다섯 번째 대칸 쿠빌라이가 고려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고려에 대한 몽골인의 정서를 읽을 수 있다. 쿠빌라이가 전임 대칸 뭉케가 급사한 뒤 막내 동생 아릭 부케와 대권 다툼이 있던 1259년, 당시 몽골과 전쟁 중에 있었던 고려는 고종의 태자 왕전(王倎)이 이끄는 사절단을 중국 땅으로 보낸다.
쿠빌라이와 동생 아릭 부케 사이에 대권경쟁이 시작된 상황에서 이렇게 하지도 저렇게 하지도 못하고 있던 왕전은 누구 쪽에 서야할 지를 고심했다. 대권경쟁의 승부가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잘못된 선택은 곧 고려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다는 점에서 왕전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민 끝에 왕전은 쿠빌라이를 만나기로 결정한다.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현명했다.
▶ 왕전의 방문에 크게 기뻐한 쿠빌라이
왕전은 장강을 건너 남송을 공격하고 악주에서 돌아오던 쿠빌라이를 만났다. 쿠빌라이는 대권장악을 위한 도박으로 남송 공격에 나섰던 것이고 왕전은 고려의 앞날을 건 도박으로 쿠빌라이를 만났던 것이다. 장강을 건너 악주전투를 성공적으로 감행함으로써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쿠빌라이는 뜻하지 않게 찾아온 왕전의 방문을 받고 크게 기뻐했다.
쿠빌라이는 왕전을 중도 교외의 동영지까지 동행 했다. 쿠빌라이는 왕전의 방문을 대칸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좋은 징조로 해석했다. 당시 쿠빌라이의 반응을 고려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는 만 리 바깥에 있는 나라다. 일찍이 당태종(唐太宗)이 몸소 공격을 하였어도 항복을 받아 내지 못했다. 이제 그 나라 세자가 나에게 왔으니 하늘의 뜻일진저......"
쿠빌라이는 고구려와 고려를 같은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 쉽게 가까워진 두 사람
절치부심(切齒腐心) 대권을 노리던 쿠빌라이와 비록 태자의 몸이지만 무신정권 아래서 자신의 뜻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지내온 왕전은 서로 통하는 바가 많았다. 쉽게 가까워진 두 사람 사이에는 서로를 이해하는 진정한 마음이 오갔다. 쿠빌라이는 왕전을 그의 본거지였던 돌룬노르의 개평부까지 함께 동행 하면서 극진히 대접했다.
그 때 고려로부터 고종(高宗)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쿠빌라이는 진심어린 애도의 뜻을 표하면서 고려왕으로 즉위하기 위해 서둘러 고려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1260년 왕전을 보낸 뒤 독자적으로 쿠릴타이를 열어 대칸의 자리에 오른 쿠빌라이는 사신을 통해 왕전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 속에는 즉위를 방해하는 무신들로부터 왕전을 철저히 보호하겠다는 뜻과 함께 몽골에 대한 원한을 풀고 덕으로 다스리는 선정을 베풀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비록 몽골에서 대권경쟁이 진행 중이기는 하지만 대칸의 자리에 오른 쿠빌라이가 태자의 든든한 후원자로 나타나자 무신들의 태도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 원종 즉위 후 우호적 분위기 유지
그 해 왕전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원종(元宗)이다. 쿠빌라이와 원종은 한 달 사이에 그들의 정식 도읍지가 아닌 상도와 강화도에서 각각 즉위하면서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 것이다. 특히 쿠빌라이가 동생을 누르고 패권을 장악하자 원종의 발언과 권위는 함께 높아졌다. 왕전의 도박이 멋지게 성공한 것이었다. 쿠빌라이는 몽골군들에게 고려 땅에서 약탈행위를 하지 말 것을 지시하고 포로 4백여 명을 돌려보내는 등 호의를 베풀었다.
또 다루가치와 사신은 물론 압록강 근처에 주둔한 군대도 철수하도록 했다. 개경으로 환도하는 일도 사정에 따라 적절한 시기에 단행해도 무방하며 몽골의 복식과 풍속도 고려에 강요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러한 우호적인 분위기가 2년 동안 이어졌다.
▶ 몽골 덕분에 폐위 5개월 만에 복귀
하지만 육지로 나갈 것을 약속하며 친(親)몽골정책을 취하는 원종의 처사는 특히 무신들의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최씨 무신정권이 무너졌지만 무신 김준(金俊)이 여전히 권력을 휘두르며 몽골에 대한 강경책을 주도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원종은 김준의 심복인 임연(林衍)을 부추겨 김준 일당을 제거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임연이 권력을 잡고 원종을 능멸했다. 임연은 특히 원종이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면서 1269년 6월,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고 원종을 폐위시키고 원종의 동생인 안경공(安景恭)을 왕위에 앉혔다. 쿠빌라이는 임연의 처사를 반란으로 간주하고 입조한 세자 왕심(王諶)과 몽골부장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에 급파했다. 또 임연이 직접 와서 자신에게 해명할 것을 요구했다. 쿠빌라이의 압박에 임연은 할 수 없이 폐위 5 개월 만에 원종을 복위시켰다. 복위한 원종은 대도로 들어가 쿠빌라이에게 사대의 예를 극진히 하겠다고 약속하고 세자를 몽골의 공주와 혼인시키자고 제의했다. 고려가 몽골의 부마국(駙馬國)이 되는 출발점이었다.
▶ 원사(元史)에 나타난 고려
실제로 쿠빌라이의 고려에 대한 호감과 애정이 대단했다는 것은 원사(元史)에 잘 나타나 있다. 원사에는 유난스럽게 고려에 대한 언급이 많다. 어떤 학자들은 중국의 어떤 사서보다 고려에 대한 언급이 많아서 원나라는 마치 고려를 제외하고는 다른 나라와 국교가 없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내용도 대부분 고려에 대해 호의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서도 몽골의 고려에 대한 정서를 간접적으로 읽어 볼 수 있다. 이런 사례에서도 역사 속에서 한국을 부르는 솔롱고스라는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형성돼 왔음을 볼 수 있다. 그 밑바닥에는 몽골인들에게는 근본적으로 한국에 대해 경외심을 안겨주는 신비의 나라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 한국과 러시아에 호감
실제로 몽골인들은 다른 나라 사람 가운데 한국인과 러시아인에게 가장 호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반면에 중국인과 일본인은 대체로 싫어한다. 좋아하는 한쪽 끝에 한국과 러시아가 있고 싫어하는 반대편 끝에 중국이과 일본이 있다고 보면 이해하기가 쉽다.
지난 1990년 몽골은 소련의 위성국가에서 벗어나면서 시장경제체제를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한국과 가장 먼저 수교를 한다.
▶ 몽골인의 솔롱고스 드림
이후 90년대 중반부터 합법이건 불법이건 간에 한국에 와서 2-3년 체류하다가 몽골로 돌아간 몽골인은 어림잡아 30만 명 이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몽골 인구가 3백 만 명 남짓이니까 어림잡아 전 인구의 10분의 1정도가 한국을 다녀간 셈이다. 이들 대부분은 대학졸업 등 고학력을 가졌지만 한국에서 주로 3D 업종에 일하면서 돈을 모아 몽골로 돌아간 사람들이다.
지금도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 몽골인들은 3만 명 전후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한국에서 열심히 일해 돈을 모아 몽골로 돌아가면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기 때문에 많은 몽골인들은 한국에 가고 싶어 한다. 이것을 ‘코리언드림’, ‘솔롱고스 드림’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일을 하면서 고용주로부터 인간적인 대접을 받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아 한국에 대해 나쁜 이미지를 갖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들을 한국으로 오도록 주선하는 브로커들은 대부분 몽골에 체류하고 있는 한국인들이다.
이들 또한 나쁜 인상을 주는 경우가 가끔 있다. 몽골에, 주로 수도 울란바토르에 체류하고 있는 한국인은 5천명 전후가 된다.
이들 대부분은 선교활동과 봉사활동 등을 통해 몽골인들에게 도움을 주는 좋은 일들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중에게는 간혹 몽골인들로부터 비난 받을 일을 하는 경우도 있다. 아직도 상당수 몽골인들에게 한국은 같은 뿌리를 가진, 같은 인종이라는 의식이 남아 있다.
또 한국은 부러워할 만한 나라라는 인식도 여전하다. 그래서 이들에게 솔롱고스가 무지개의 나라로 남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관심을 가지는 노력이 필요하다.
몽골의 다섯 번째 대칸 쿠빌라이가 고려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고려에 대한 몽골인의 정서를 읽을 수 있다. 쿠빌라이가 전임 대칸 뭉케가 급사한 뒤 막내 동생 아릭 부케와 대권 다툼이 있던 1259년, 당시 몽골과 전쟁 중에 있었던 고려는 고종의 태자 왕전(王倎)이 이끄는 사절단을 중국 땅으로 보낸다.
쿠빌라이와 동생 아릭 부케 사이에 대권경쟁이 시작된 상황에서 이렇게 하지도 저렇게 하지도 못하고 있던 왕전은 누구 쪽에 서야할 지를 고심했다. 대권경쟁의 승부가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잘못된 선택은 곧 고려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다는 점에서 왕전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민 끝에 왕전은 쿠빌라이를 만나기로 결정한다.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현명했다.
왕전은 장강을 건너 남송을 공격하고 악주에서 돌아오던 쿠빌라이를 만났다. 쿠빌라이는 대권장악을 위한 도박으로 남송 공격에 나섰던 것이고 왕전은 고려의 앞날을 건 도박으로 쿠빌라이를 만났던 것이다. 장강을 건너 악주전투를 성공적으로 감행함으로써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쿠빌라이는 뜻하지 않게 찾아온 왕전의 방문을 받고 크게 기뻐했다.
"고구려는 만 리 바깥에 있는 나라다. 일찍이 당태종(唐太宗)이 몸소 공격을 하였어도 항복을 받아 내지 못했다. 이제 그 나라 세자가 나에게 왔으니 하늘의 뜻일진저......"
쿠빌라이는 고구려와 고려를 같은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 쉽게 가까워진 두 사람
그 때 고려로부터 고종(高宗)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쿠빌라이는 진심어린 애도의 뜻을 표하면서 고려왕으로 즉위하기 위해 서둘러 고려로 돌아갈 것을 권했다. 1260년 왕전을 보낸 뒤 독자적으로 쿠릴타이를 열어 대칸의 자리에 오른 쿠빌라이는 사신을 통해 왕전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 속에는 즉위를 방해하는 무신들로부터 왕전을 철저히 보호하겠다는 뜻과 함께 몽골에 대한 원한을 풀고 덕으로 다스리는 선정을 베풀 것을 당부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비록 몽골에서 대권경쟁이 진행 중이기는 하지만 대칸의 자리에 오른 쿠빌라이가 태자의 든든한 후원자로 나타나자 무신들의 태도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 원종 즉위 후 우호적 분위기 유지
▶ 몽골 덕분에 폐위 5개월 만에 복귀
하지만 육지로 나갈 것을 약속하며 친(親)몽골정책을 취하는 원종의 처사는 특히 무신들의 반감을 불러 일으켰다. 최씨 무신정권이 무너졌지만 무신 김준(金俊)이 여전히 권력을 휘두르며 몽골에 대한 강경책을 주도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원종은 김준의 심복인 임연(林衍)을 부추겨 김준 일당을 제거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임연이 권력을 잡고 원종을 능멸했다. 임연은 특히 원종이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면서 1269년 6월,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고 원종을 폐위시키고 원종의 동생인 안경공(安景恭)을 왕위에 앉혔다. 쿠빌라이는 임연의 처사를 반란으로 간주하고 입조한 세자 왕심(王諶)과 몽골부장에게 군사를 주어 고려에 급파했다. 또 임연이 직접 와서 자신에게 해명할 것을 요구했다. 쿠빌라이의 압박에 임연은 할 수 없이 폐위 5 개월 만에 원종을 복위시켰다. 복위한 원종은 대도로 들어가 쿠빌라이에게 사대의 예를 극진히 하겠다고 약속하고 세자를 몽골의 공주와 혼인시키자고 제의했다. 고려가 몽골의 부마국(駙馬國)이 되는 출발점이었다.
▶ 원사(元史)에 나타난 고려
그리고 그 내용도 대부분 고려에 대해 호의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서도 몽골의 고려에 대한 정서를 간접적으로 읽어 볼 수 있다. 이런 사례에서도 역사 속에서 한국을 부르는 솔롱고스라는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형성돼 왔음을 볼 수 있다. 그 밑바닥에는 몽골인들에게는 근본적으로 한국에 대해 경외심을 안겨주는 신비의 나라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 한국과 러시아에 호감
▶ 몽골인의 솔롱고스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