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석규의 대몽골 시간여행-78] 뭉케시대는 왜 징검다리 정권인가?

2017-11-08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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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배석규 칼럼니스트]

▶ 쿠빌라이 정권 태동 준비

[사진 = 뭉케 초상화]

과격한 출발로 생긴 가문들 사이의 앙금을 불안정한 요소로 지닌 채 뭉케 정권이 출범했다. 제국의 권력이 오고타이가에서 툴루이가로 옮겨가면서 서방으로 향하던 관심은 동방지역으로 돌려지게 된다. 유럽지역으로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이와 함께 또 한사람의 영웅인 쿠빌라이 정권의 태동이 준비되고 있었다.

▶ 준비된 제왕 뭉케

[사진 = 뭉케시대 동방 정벌도]

숙청이라는 과격한 방법으로 출발하기는 했지만 마흔 네 살에 대칸의 자리에 오른 뭉케는 칭기스칸의 자손들 가운데 첫 손가락에 꼽을 만큼 유능했다. 지적인 능력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났고 숱한 원정의 참여 등을 통해 다져진 정치가나 군인으로서의 바탕도 훌륭했다.

유목민 지도자로서는 드물게 몇 나라의 말을 구사하고 동서의 학문과 문화에도 조예가 깊었다. 게다가 과묵한 성격에 말이 적은 그는 사치와 탐욕을 미워했다. 또 할아버지 칭기스칸이 남긴 교훈을 따르면서 그 유산을 되살리려고 노력했다. 준비된 제왕으로서 모자람이 전혀 없는 인물이 대칸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후에 대칸의 자리를 꿰차는 동생 쿠빌라이와 다른 점은 뭉케는 몽골의 전통성을 최대한 살리는 바탕 위에서 제국을 정비해 나갔다는 점이다. 쿠빌라이는 아무래도 중화사상에 어느 정도 물든 측면이 있었다.

▶ 과격하지만 명쾌한 출발
대량숙청으로 통치의 기반을 굳힌 뭉케는 통치기구를 정비하고 중앙집권화를 위한 장치를 마련해 나가는 작업을 쾌도난마(快刀亂麻)식으로 풀어 나갔다. 다만 자신을 대칸의 자리에 오르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바투에게는 대몽골 제국과 관계를 유지하되 실제로는 킵차크한국을 독자적으로 경영해 나가도록 묵인했다. 일종의 권력 분할이 이루어진 셈이었다. 그 외 지역에 대해서는 중앙에서 재무와 징세 담당자를 새로 임명했다.

[사진 = 트루판의 위구르인]

중앙정부에는 주로 몽골인과 위구르인들이 포진됐고 점령지에는 몽골군의 책임자 아래 그 지역 출신 관료들이 기용됐다. 제국 전역에 인구조사를 일제히 실시함으로써 세수확보의 기반도 확고히 만들었다. 자연히 재정이 정상화되고 통치지역과 중앙정부 사이에 물자교류가 활성화 되기 시작했다.
 

[사진 = 카라코룸 추정도]

각지에서 물자를 실은 수레가 하루 5백대 이상 카라코룸으로 몰려들었다. 또 각종 장인과 선교사 등 많은 외국인들이 북적거렸다. 뭉케는 특히 불교와 도교 네스토리우스교 등 각종 종교에 대해 호의적인 정책을 취해 많은 종교인들이 카라코룸에 사원을 지어두고 들락거렸다.

▶ 다시 불 지핀 정복전쟁

[사진 = 어린 쿠빌라이(집사)]

제국의 정비와 함께 뭉케는 중단된 정복전쟁에 다시 불을 지폈다. 하지만 정복전쟁의 성격은 전임자들과 달랐다. 일단 유럽 쪽은 제쳐둔 채 주로 동방지역에 대한 미진한 정복전쟁을 재개한 것이다. 아마도 바투와의 권력 분점의 결과로 서쪽 러시아와 유럽은 바투의 판단과 선택에 맡겨 놓았기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사진 = 금련천 초원]

우선 둘째 동생 쿠빌라이에게는 동방 경영의 책임을 맡겼다. 화북과 강남의 남송, 티베트, 고려, 안남 등지에 대한 정복 사업은 쿠빌라이의 몫으로 넘겨졌다. 그 역할을 수행하도록 쿠빌라이에게는 금련천 초원이 그 본거지로 주어졌다.

셋째 동생 훌레구에게는 이란으로부터 서쪽 모든 땅의 경략을 위임했다. 칭기스칸이 호레즘 정벌 때 정복했던 아프간 지역 서쪽의 모든 땅에 대한 정복과 통치를 맡긴 것이다. 훌레구에게는 유럽 원정군 편성 때처럼 각 천 호에서 10호당 두 명씩 뽑아서 새로운 부대를 만들어 줬다. 또 당시 이란 지역에 파견돼 있던 초마르칸 군대도 그 휘하에 두도록 했다.
막내 동생 아릭 부케에게는 서몽골고원의 툴루이家 본영지를 지키도록 했다. 정복전쟁을 위한 뭉케의 계획은 결과적으로 정복전쟁이 돼버린 선대의 대부분 정복전쟁과 달리 애초부터 분명한 의도를 갖고 치밀하게 추진됐다.

▶ 역사의 전면에 나선 쿠빌라이

[사진 = 몽골 정벌도]

당시 그 모양을 정리해 보면 서북 러시아 쪽에는 바투가 이끄는 킵차크한국, 서남쪽은 훌레구가 이끄는 서정(西征)군, 동남쪽은 쿠빌라이가 이끄는 동정(東征)군, 동북쪽은 옷친긴가의 다가차르를 필두로 한 동방 3가, 서몽골 지역은 아릭 부케 그리고 몽골 본토는 뭉케 형태로 그려진다.

여기에서 뭉케와 쿠빌라이, 훌레구, 아릭 부케 등 툴루이의 아들 네 형제가 정권을 잡고 대몽골 제국을 다스리는 모양이 확연히 드러난다. 이로서 제국의 다음 세대를 이끌고 갈 중심인물 쿠빌라이와 훌레구라는 두 인물이 드디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 통치기간 짧아 징검다리 정권

[사진 = 상도 성터]

뭉케의 통치기간은 고작 8년이었다. 만일 그가 일찍 죽지 않았다면 몽골제국의 운명은 훨씬 달라졌을 것이다. 각 지역으로 분열된 형태가 아니라 비교적 통합된 형태를 유지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그의 통치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자신이 펼친 것을 거의 마무리 짓지 못했다. 유능한 군주의 패기만만한 출발이었지만 그 성과를 이루지 못한 채 정권이 동생 쿠빌라이에게 넘겨졌다는 점에서 뭉케정권 역시 결과적으로는 징검다리 정권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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