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7년 미국의 월스트리트 저널(Wall Street Journal)은 미스터리 인류유산 일곱 가지를 선정했다. 그 첫 번째로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는 칭기스칸의 무덤을 들었다. 예수가 만찬 때 사용한 성배(聖杯)와 러시아의 엠버 룸(Amber Room:호박방) 그리고 고대이집트의 왕비 네페르티티(Nefertiti) 의 무덤 등 여섯 가지를 그 외의 찾지 못한 미스터리로 들었다.
그래서 무덤의 발견은 고고학적으로, 지정학적으로 매우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여러 나라 사람들이 그 일에 매달리고 있는 이유다. 칭기스칸의 묘를 찾을 수 있을 것인지 아니면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을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우선 그의 죽음에서 매장까지의 과정을 훑어보면서 그 문제를 한번 생각해보도록 하자.
▶ 육반산 청수하에서 숨져
호레즘 정벌을 마무리하고 몽골로 돌아온 칭기스칸은 1225년 겨울에서 이듬해 여름까지 툴강 근처 초원지대에서 보냈다. 지금의 수도 울란바타르 근처 초원지대다. 칭기스칸은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서하 정벌이 마무리될 시점에 칭기스칸은 텡그리(하늘)가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1227년 여름, 칭기스칸은 현재의 평량(平凉) 근처 청수하(淸水河)에서 숙영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평원과 삼림이 우거진 육반산(六槃山) 근처 청수하에 진을 치고 하늘의 부름에 응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셋째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1227년 8월, 그의 나이 예순 다섯이었다. 몽골 유목민으로서는 비교적 장수한 편이었다. 자신의 죽음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것이 칭기스칸이 남긴 마지막 유언이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칭기스칸의 죽음은 극소수 사람들에게만 알려졌다.
▶ 설(說)분분한 칭기스칸 죽음
몽골비사는 칭기스칸이 1226년 겨울 사냥 중에 말에서 떨어져 상처를 입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개해(1226년) 가을에 야생마를 사냥할 때 야생마들이 다가오자 칭기스칸이 탄 황토빛 재빛 말이 놀라는 바람에 칸이 말에서 떨어져 살이 몹시 아파 근처에서 야영했다."
이때의 상처가 도져서 죽은 것으로 몽골비사는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기후병이 원인이었다는 주장도 있고 말라리아로 죽었다는 설도 있다. 전투 중 화살에 맞은 상처가 덧나 죽었다는 주장도 있다. 여기에 서하왕의 아름다운 부인 퀴르벨진이 칭기스칸과 잠자리를 하면서 그의 국부에 상처를 입힌 것이 덧나 결국 성병으로 숨졌다는 주장까지 있다.
그러한 주장들은 칭기스칸에 대한 기록자의 입장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나타나고 있다.
▶ 장례행렬 마주친 사람 모두 처형
분명한 것은 1227년 8월에 육반산 근처 청수하에서 숨을 거두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시신은 수레에 실려 몽골 초원으로 향했다. 자신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라는 유언에 따라 장례행렬이 지나는 도중에 마주친 사람은 모두 처형돼 칭기스칸의 저승길에 동반자가 됐다.
▶ "부르칸 칼둔 어딘가 묻혔을 것"
그러나 칭기스칸이 부르칸 칼둔의 어느 지점에 묻혔다고 알려져 있을 뿐 무덤의 위치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지금 아무도 없다. 죽을 당시 그가 자신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점에서 볼 때, 그가 묻힌 곳은 당시에도 극소수 사람만 알고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