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일혁은 제18전투경찰대대를 하나씩 채워나갔다. 옹골연유격대에서 같이 활동했던 김규수(金圭洙)를 경사로 특채하여 보신병(保身兵)으로 삼고, 대대로 배치된 박대훈 경위와 최봉환 경사와 함께 대원 모집에 나섰다. 부대는 만들어졌는데 싸울 대원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먼저 서울에서 전주로 피란 온 대학생들을 위해 세운 전시연합학교가 있는 옛 전주감영으로 달려가 학생들을 설득하여 40명을 모집했다. 여기에 전란으로 가족이 학살당한 나이어린 유자녀 40여명, 경상도 경찰간부학교에서 갓 졸업하고 온 김근수·이진찬·조명제·이원배 경위와 전쟁 초기 북한군과의 전투경험이 있는 박기락·이기린 경사 등 50여명이 합류함으로써 대원들은 200명으로 불어났다. 중대장에는 호국군 출신 부하들인 우희갑과 김진구를 임명하고, 정동렬 경위를 중화기 중대장에 임명함으로써 겨우 전투편성을 마칠 수 있었다.
지급된 장비와 보급품도 형편없었다. 제18전투경찰대대가 보유한 장비로는 일제(日製)99식 소총, 일제38식 소총, 일제44식 소총이 주류를 이루었고, 미제(美製) M1소총은 단 한 자루뿐이었다. M1소총은 대대장 보신병 김규수 경사가 휴대했다. 중화기로는 소련제 82미리 박격포 1문과 미제 60미리 박격포 2문이 전부였다. 이 박격포도 북한군에게서 빼앗은 노획무기였다. 그런데 박격포탄은 미제 밖에 없었기 때문에 소련제 82미리 포신에다 미제 81미리 포탄을 사용한 관계로 정확도가 떨어졌다. 모든 면에서 전투를 할 수 있는 준비가 갖추어지지 않았다.
대원들에게 지급되어야 할 보급품도 형편없었다. 군화대신 짚신이나 농구화를 신고 싸워야 했다. 창설당시 제18전투경찰대대는 겨울철 동계작전을 수행해야 되는데 그런 신발을 신고 전투를 해야 했다. 방한피복은 고사하고 입고 있는 옷조차 남루했다. 침구류도 엉망이었다. 매트리스가 없어 가마니를 깔고 각자가 집에서 가져온 이불을 덮고 자야 했다. 그 중에는 이불도 없이 자는 대원들이 수두룩했다. 차일혁은 야간순찰 중 가마니를 깔고 덮은 대원을 보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잘 먹이지도 못하고, 이런 엄동설한에 적과 싸워야만할 운명이라니, 한참 집에서 호강할 나이에…”하며 가슴아파했다. 빨치산 토벌부대인 제18전투경찰대대는 이런 열악한 조건에서 출발했다.
차일혁은 전투를 통해 본 대원들의 전투행동을 보고 평가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적합한 보직을 찾아줬다. 전투를 해 보면 전투원으로서 자격이 있는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아무리 덩치가 크고, 평소 용감한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실제 전투에서는 겁을 먹고 뒷걸음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반대로 평소 내성적이면서 말이 없는 사람이 실제로 전투에 임하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좌충우돌하면 전투를 잘하는 경우가 있다. 차일혁은 구이작전을 통해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적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자신을 아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차일혁은 구이면 첫 정찰에 따라갔던 샌님성격의 허민 순경이 빨치산이 해놓은 밥솥을 들고 오자 심하게 꾸짖었다. “빨치산이 그 안에 독약이라도 뿌려 놓았으면 어쩌겠느냐?”며 나무랐다. 그러면서도 차일혁은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저렇게 밥솥을 들고 왔을까?”하며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다. 그러면서 “저렇게 약해 보이는 저 친구가 어떻게 전투를 할 수 있을까?”하는 걱정도 앞섰다.
그래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차일혁은 허민 순경을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었다. 막상 빨치산의 기습을 받고 차일혁 부대가 고전하자, 허민 순경은 빨치산이 있는 고지로 앞장서 기오 올라가더니 수류탄을 던졌다. 그의 과감한 행동에 빨치산도 주춤했다. 그 사실을 전해들은 부대원들은 모두 놀랐다. “샌님 같은 그가 어떻게 그런 과감한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하고 속으로 걱정했다. 그런데 정반대의 현상도 나타났다. 허민 순경과는 달리 평소 용감해 보이던 김근수 경위와 이진찬 경위는 전투원으로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차일혁은 김근수 경위는 사무행정을 보도록 조치했고 이진찬 경위는 보급행정을 보도록 했다. 반면 유가족 자녀들은 전투시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앞장서서 빨치산들과 싸워 많은 전과를 올렸다.
짧은 시간에 급히 만들어진 전투경찰부대라 전투 중 탈영병이 상당수 발생했다. 그 당시 전투경찰은 탈영한다고 해서 특별히 규제할 방법이 없었다. 차일혁은 새로이 대원들을 모집하면서 믿을 만한 대원들을 시켜 탈영한 대원들을 찾아 나서게 했다. 그들의 노력으로 절반 정도의 대원들이 다시 돌아왔다. 이때 차일혁은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탈영해서 복귀한 대원들을 부대 유치장에 집어넣었다. 다시는 부대를 이탈하지 않겠다며 선처를 빌었지만, 차일혁은 유치장에 넣어 둔 채 모른 척 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차일혁은 연병장에 전 대원들을 집합시키고 유치장에 있는 대원들을 데려오게 했다. 그런 후 차일혁은 향후 대원들의 행동에 미칠 감동적인 훈시를 했다.
“여러분들은 경찰서에서 행정업무를 하는 경찰이 아니라 빨치산 토벌을 하는 전투경찰이다. 일반 경찰들은 전투경찰을 하찮은 것이라 생각하고 전투경찰이 되기를 기피하는가하면, 전투경찰이 되었다 해도 기회만 있으면 일반 경찰관서로 빠져 나가려고 한다. 나는 얼마 되지 않은 기간이지만, 여러분과 함께 훈련하면서 하루 속히 공비들을 토벌하여 치안을 확보하기 위해 내 혼신의 힘을 기울이고 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공비토벌을 하다가 피를 뿌리고 쓰러진다 해도 전투경찰을 버리지는 않겠다. 제군들 가운데 죽음이 두려워 전투경찰을 그만두려는 자가 있다면 내가 용서치 않겠다. 지금 제군들 앞에 비겁하게 도망쳤던 사람이 있다. 이번은 처음인 만큼 용서하겠다. 그러나 또 이런 일이 발생한다면 공비들을 토벌하기 전에 탈영병들을 먼저 처단하겠다.”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은 제18전투경찰대대를 맡아 풋내기 대원들을 모집하여 편성하고, 열악하지만 무장을 갖춘 다음, 첫 전투를 통해 빨치산들을 전율케 하는 빨치산 토벌부대로 거듭나게 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힘들고 험난한 가시밭길이었다. 그럼에도 차일혁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빨치산 토벌을 통한 후방지역 안정을 위해 그런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