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세 논의 테이블 올려라"…사회적 합의 기구 필요성도 대두
(서울=연합뉴스) 신재우 기자 =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
대선 후보들이 복지 공약을 앞세워 표심 얻기 경쟁을 벌이고 있다. 아동수당 도입, 기초연금 확대, 기초생활보장제도 부양의무자 폐지, 육아휴직 급여 인상, 국공립보육시설 확대 등이 대표적이다.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복지 공약을 다 지키려면 연간 10조원 이상의 비용이 들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복지는 사회안전망일 뿐만 아니라 국가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가능케 하는 생산적인 투자가 될 수 있다. 복지 확대는 시대적 흐름이기도 하다.
다만 현세대가 '공짜 점심'을 먹고, 후세대가 '빚잔치'를 하게 되는 상황은 피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사회가 복지에 얼마를 쓸지, 어떤 방식으로 필요한 재원을 확보할지 '사회적 합의'를 먼저 이뤄내야 한다는 지적이다.
◇ 복지지출 OECD 최하위지만 증가 속도 빨라…"국가부채 확대 가능성"
우리나라는 조세부담률과 재정지출이 모두 작은 '저부담-저복지' 국가로 분류된다.
2014년 기준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복지지출 비중은 9.7%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인 21.1%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복지지출 비중이 30%가량인 복지 선진국과 비교하면 차이는 더 크다.
복지 수준을 논의하려면 복지국가 유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스웨덴·벨기에·핀란드 등 북·서유럽 국가들은 복지지출과 국민부담률(조세부담률+사회보장부담률)이 동시에 높은 '고부담-고복지' 구조로 분류된다.
반대로 영국·미국은 정부가 복지 문제에 최소한으로 개입해 지출도 국민부담도 모두 낮은 '저부담-저복지' 구조다.
OECD 평균 이상의 복지 지출을 하는데도 세금은 적게 내는 스페인·그리스·포르투갈과 같은 남유럽은 '저부담-고복지'로 분류된다.
이웃 나라 일본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저부담-저복지'였으나, 급격한 고령화로 복지 비용이 빠르게 증가하면서 최근에 '저부담-고복지'로 돌아섰다.
'저부담-고복지'는 나랏빚이 급격하게 증가하기 때문에 상당 수준의 경제 발전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언제까지나 지속가능한 구조는 아니다.
연금 지급에 관대했던 남유럽은 재정위기를 겪으면서 유럽연합(EU) 내부 갈등의 불씨가 됐고, 일본은 GDP 대비 정부부채가 2000∼2009년 연평균 177%이던 것이 2010∼2015년에는 238%로 치솟으며 재정이 급격히 악화하고 있다.
올해 우리나라 사회복지(기초생활보장·노동·노인/청소년·보육/가족/여성·보훈·사회복지일반·주택·취약계층지원) 예산은 국가 전체 예산 405조원의 9.0%인 36조원이다.
선진국에 비해서는 크게 낮은 수준이지만 예산 증가 속도는 매우 빠르다.
사회복지예산은 2008년에 전년 대비 21% 증가한 이래 올해까지 거의 매년 두 자릿수의 증가율을 기록했는데 노인빈곤과 저출산 등 당면한 사회 문제에 정부가 재정으로 개입한 결과다.
이런 추세는 앞으로도 지속할 전망이다. 가계소득 감소, 분배 악화, 저출산, 고령화, 4차 산업혁명 등에 따른 노동시장 환경 변화를 감안하면 복지 확대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의 복지 경험, 현재 재정 상황 등을 고려해 우리 여건과 역량에 적합한 복지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 시급한 이유다.
한국은행 국제경제부 김윤겸 과장은 "우리나라는 짧은 기간에 선진국 수준의 복지제도 틀을 갖췄다"며 "현재 복지제도가 유지된다면 인구구조 변화 등으로 인해 국가부채가 크게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 증세 토론·합의기구·로드맵 통해 합의 시도해야
현세대와 미래세대가 공유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복지 수준과 부담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어떻게 이뤄야 할까.
증세 없는 복지가 가능한지, 국민부담을 높여 저복지에서 중복지로 갈 것인지, 누구에게 세금을 더 걷을지, 복지 우선순위는 무엇인지를 합의하기는 지난한 일이다.
선거는 투표 행위를 통해 사회적 합의를 이룰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하지만 이번 대선에서 유력 후보들은 재원 방안을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아 선거를 통한 합의는 물 건너간 상태다.
복지 전문가들은 새 정부가 재원에 있어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구인회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OECD의 GDP 대비 복지 지출이 평균 20% 정도인데 우리나라의 경제 규모를 고려하면 OECD 평균 도달을 지향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며 "그렇다면 핵심 문제인 증세에 대해서 논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구 교수는 "현재 강조되고 있는 기초연금, 아동수당, 청년수당 등은 사회보험이 아니라 일반조세로 충당해야 하는데 증세 이야기를 제대로 안 한다"며 "이 문제에 대한 합의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복지 공약은 결국 상당히 후퇴하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해식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사회통합연구센터장도 "복지제도를 새로 도입할 때는 '세율 조정'을 통해 돈을 마련하겠다는 원칙을 먼저 제시한다"고 밝혔다.
정 센터장은 "예산을 구조조정하거나 재정을 쓰겠다고 하지 말고 세율 조정을 먼저 얘기해야 토론이 활발해지고 큰 틀에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다"고 강조했다.
사회적 합의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은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당시 후보는 복지 공약과 관련해 국민대타협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밝혔고, 이후 국가부채가 늘어나자 야권에서는 위원회를 가동하라고 요구한 바 있었다"며 "기구 구성을 공약에 담고 이를 실행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제안이 없으면 사회적 논의도 이뤄질 수 없다"며 "국가 운영 세력이 비전과 가치에 따라 계획과 방안을 명확히 제안해야 수용 여부에 대해 비로소 논의가 시작될 것"이라고 제언했다.
새 정부가 공약 실천 로드맵을 발표하는 과정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끌어낼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남은경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사회정책팀장은 "1년 정도 치밀하게 추진 단계와 재원 방안을 마련해 발표할 필요가 있다"며 "당선된 이후에 '돈이 없어서 안되겠다'는 식으로 정책을 엎어버린다면 토론도 합의도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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