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한준호 기자 = "회장님. 선경그룹의 사업 포트폴리오가 조금 부족한 것 아니냐는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989년 선경그룹이 마련한 고(故) 최종현 선대회장과 신입사원과의 대화 자리에서 신입사원이던 박정호 사장이 회장에게 당차게 던진 질문이다.
최고경영자(CEO)와 마주하기 조차 힘들었던 생초짜 말단 직원이 당돌하게 던진 질문에 선대회장은 주저없이 "그룹이 미래를 이끌어갈 신성장동력 찾기에 집중하고 있다"며 임직원이 함께 고민해 나가야 한다고 주문했다.
박 사장은 선경이 더 다양한 사업 포트폴리오를 가져야 한다는 소신을 가졌다. 회사가 글로벌 무대에서 성장하려면 다양한 사업 포트폴리오가 준비돼 있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박 사장이 선경에 입사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동통신사업에 진출하기 위한 테스크포스(TF)팀 구성이 전 계열사를 통해 진행됐다. 선경이 다음 성장 동력으로 지목한 ‘이동통신’이 바로 선경의 차세대 포트폴리오라고 확신한 박 사장은 TF팀에 자원해 이동통신 사업 진출 업무에 본격 합류했다.
TF팀은 우여곡절 끝에 SK텔레콤의 전신이었던 한국이동통신 인수에 성공하고, 1996년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상용화를 선도하면서 이동통신 산업은 폭발적으로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박 사장은 발 빠른 사업 포트폴리오의 구상이 회사의 미래 성장 동력을 견인하는데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몸소 익혔다.
박 사장이 이끄는 이동통신산업은 꽃이 피었다 지고 융성했다가 쇠퇴하는 ‘영고성쇠(榮枯盛衰)’가 가장 많이 일어나는 분야다. 한 가지 사업에 의존하다보면 트렌드를 놓쳐 낙오되기 쉽상이다. 박 사장은 성장과 쇠퇴라는 사이클 속에서 사업 포트폴리오를 재구상해 다음 성장 동력을 미리 준비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이러한 포트폴리오를 통해 최근 사회적 화두인 4차 산업혁명에 선제적으로 투자하고, 완만한 기업군을 만들어 그 시대를 이겨내는 먹거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박정호식 경영전략이다. 그리고 그 실행력을 높이는 과정에서 인수·합병(M&A)를 도구로 활용한다. 박 사장이 M&A 전문가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 경영 컨설턴트는 “포트폴리오 접근법은 전략적 분석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가장 실용적인 방법”이라며 “사업들을 포트폴리오로 간단히 도식화했기 때문에 기업이 직면한 전략적 대안의 중요한 특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SK텔레콤이 지난 2011년 하이닉스반도체를 인수하는 과정에서도 포트폴리오 접근 전략은 빛을 발했다. 박 사장은 SK그룹의 미래 먹거리가 반도체가 될 것이라는 포트폴리오를 이미 준비했기 때문이다. 박 사장은 하이닉스 반도체 인수팀장을 맡으며 인수과정을 진두지휘했다. 그룹 내에서 하이닉스 인수를 반대하는 임원들의 논리를 반박하기 위해 불철주야 반도체 삼매경에 빠지기도 했다. SK하이닉스가 국내 기업 사상 세번째로 1분기 영업이익 2조원 시대에 진입하면서 박 사장의 선견은 더욱 힘을 얻게 됐다. 최근 도시바 반도체 인수사업에 뛰어든 최태원 회장이 24일 일본 방문길에 박 사장을 동행시킨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지난해 말 SK텔레콤 사장으로 자리를 옮긴 박 사장은 이미 ‘뉴ICT 생태계 조성’이라는 탈 통신 포트폴리오의 큰 그림을 펼치고 있다. 그가 기치로 내건 ‘뉴ICT 생태계’는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사물인터넷(IoT)등 다양한 기술과 서비스를 융합시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 내는 전면적 개방 시스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