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성이 모질지 못했던 차일혁은 늘 인정이 넘쳐흘렀다. 차일혁은 어떤 경우에라도 주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주민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반드시 도움의 손을 내밀어야 직성이 풀렸던 ‘민생(民生)경찰’이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가족들의 생활과 안위(安慰)는 어려운 처지에 놓인 주민들보다 항상 뒷전이었다. 가족들에게 그런 차일혁은 무심한 남편이자 아버지였다.
고창작전 무렵 부인이 맹장염 후유증으로 시달린 적이 있었다. 차일혁은 계속되는 토벌작전으로 아내를 보살피지도 못하다가 고창작전이 끝나고 나서야 겨우 부인을 데리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원장은 수술경과를 설명하고 나서 전북일보와 각 신문에 실리고 있는 차일혁의 제18전투경찰대대의 ‘무용담 기사’를 잘 읽었다며 반겼다. 아내의 병실에서 오랜만에 5살 난 막내아들을 보는 순간 차일혁은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훌쩍 커버린 아들을 보고나니 아버지로서 해준 것이 없다는 생각이 퍼뜩 지나갔기 때문이다.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해 준 게 무엇인가 고민을 하였다. 그럼에도 차일혁의 행동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어렵고 힘든 주민들을 보면 호주머니라도 털어서 도와줘야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차일혁은 물욕(物慾)이 없었다. 뭐라도 생기면 주변의 불우 이웃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 사용했다. 빨치산 토벌작전 당시 차일혁은 빨치산으로부터 노획한 쌀과 농우(農牛)는 반드시 주인을 찾아 줬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토벌작전을 전후하여 작전지역의 주민이나 기관으로부터 성금이나 물품을 기부 받으면 즉시 되돌려 줬다. 주민들에게 조금이라도 불편이나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차일혁의 따뜻한 마음에서 나온 배려였다. 전쟁통에 집을 잃어버린 전재민(戰災民)들에게는 집을 지어 살게 해줬다. 심지어는 토벌작전 공로로 받은 포상금까지 피난민 등 주변의 불우한 처지의 주민들에게 나눠줬다. 차일혁에게 그런 일은 생소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늘 상 벌어지는 흔한 일이었다.
“공고(公告). 금반 본 대대가 무악산 방면 공비토벌작전 중 무악산 중복(中腹)에서 공비(共匪) 농우 2두(황색 암소 4세, 5세 각 1두)를 인색도주(引索逃走)함을 발견, 해적(該敵)을 사살하고 농우 2두를 노획하였사오니, 공비에게 농우를 약탈당한 자는 아래와 같은 수속으로 본 대대 정보계에 문의하여 주시옵기 공고하나이다. -.우주(牛主·소주인)가 다수 이음으로, 1.거주부락 구장 및 유지(有志) 2명의 보증서, 2.면장 및 지서주임의 인정서 각 1통. =.기간 6월 11일부터 6월 17일까지(7일간). 단기 4284년(서기 1951년) 6월 10일. 제18전투경찰대대장 차일혁”
차일혁은 행사를 마친 뒤 완주군 우전면에 있는 전쟁고아원을 방문하고 부대원들이 푼푼히 모은 위문품과 작전 중 노획한 물품들을 전달했다. 차일혁은 전북도경 공보실장과 도경 선전주임 박상남 경위를 함께 전쟁고아들을 돌아보며 눈시울을 적셨다. 어른들의 이념 싸움에 희생된 천애무고의 어린 고아들을 바라볼 때, 새삼 전쟁의 비참함을 느꼈다. 맑아야만 할 그들의 눈에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가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차일혁은 “저 애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면 이 못난 어른들의 싸움을 어떻게 이야기 할까?”하며 잠시 상념에 젖었다. 그리고 “언제 죽을 지도 모르고 전장을 떠도는 자신에게 돈이 무슨 필요가 있나?”하는 생각에 월급봉투를 내놓고 떨어지지 않은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차일혁의 그런 선행으로 집에 있는 가족들은 월급봉투 없는 한 달을 또 다시 고통스럽게 지내야 했다. 그런 일은 차일혁에게 다반사(茶飯事)였다.
차일혁은 작전지역 주민들에게는 티끌만큼의 피해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1951년 3월 칠보작전을 끝낸 다음, 차일혁은 전주로 돌아와 그동안 밀린 서류들을 정리하던 중 몇 가지 특이한 사실을 발견했다. 제18전투경찰대대로 들어오는 각종 성금과 위문품들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는 점이다. 물론 차일혁도 제18전투경찰대대의 전과가 도내에 널리 알려지게 되면서 성금과 위문품이 꾸준히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급격히 증가한 것을 보고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일혁은 그 일을 관장하는 경리주임과 보급주임 그리고 서무주임을 함께 불렀다. 차일혁은 “왜 이렇게 갑자기 성금과 위문품이 늘어났는가, 혹시 강제로 거둔 것이 아닌가?”라며 물었다.
세 명 모두 우물쭈물하며 대답이 없었다. “이것 모두가 강제로 거둔 것이지?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했어?”라며 차일혁은 역정을 내며 질책했다. “지금의 부대 예산으로는 경비를 감당할 수 없어 궁여지책으로 기부금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차일혁은 “당장 돌려주도록 하시오. 부대 살림이 힘들더라도 참고 맡은 임무를 수행해야 떳떳하지, 기부금을 거둔다면 우리 부대에 거는 국민들의 기대와 신뢰는 그만큼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경찰이 시민의 신뢰를 잃는다면 어찌 경찰이라고 하겠어?” 차일혁은 경리주임을 시켜 기부금으로 받은 돈을 즉시 돌려주고, 다시는 강제성 기부금을 걷지 말라고 지시했다. 늘어난 대원들을 먹이고 입히는 일은 전투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었다. 차일혁 부대는 연일 공비토벌에 신명을 다하고 있으나, 예산부족으로 마음껏 활동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기부금을 받기보다는 더욱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이 마땅하다고 차일혁은 생각했다.
차일혁은 1951년 11월 28일 무주경찰서장에 취임해 기관장과 군민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취임식에서 차일혁은, “친애하는 무주군민 여러분. 뜨거운 환영에 먼저 감사드리고, 이 환영 속에 들어 있는 무언의 기대와 격려에 보답할 수 있도록 분골쇄신 맡은바 임무를 기필코 다하겠습니다. 나는 단시일 내에 공비들을 격멸하여 치안을 확보하는데 주력하겠습니다. 이곳 무주의 산기슭 개천마다 나와 공비들과의 결전장이 아니었던 곳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전우들의 고귀한 피가 뿌려져있는 이곳에서, 산화한 대원들의 복수를 하여 그들의 명복을 기원한다는 의미에서도 공비들이 절대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겠습니다. 완전한 민주경찰로서 민폐를 끼치는 경찰관은 근절시키겠습니다. 항상 밝은 얼굴로 여러분의 좋은 친구가 되겠습니다. 전쟁의 상처 속에 있는 우리 무주를 하루 속히 복구하는데 모두 힘을 합해 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취임식을 마치고 퇴근 할 무렵 무주에서 문구상을 하는 손씨라는 화교가 차일혁을 찾아왔다. “서장님 출근 첫날에 대단히 죄송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일은 저와 식구들의 밥줄이 달린 문제입니다.” 차일혁은 전투경찰로서는 겪어보지 못한 민원을 처음 대하게 되니 내심 당황해 하며 그의 말을 들었다. 그는 “지난 일 년 동안 경찰서에 문구 잡화를 외상으로 납품했으나, 그 대금을 전혀 받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얼마 전 부산에서 물품을 구입해 오다가 공비들의 기습으로 물건을 모두 빼앗겨 당장 호구지책이 어렵다며 하소연했다. 그가 내민 외상 청구액은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차일혁은 경무계장을 불렀다. 경무계장은 손씨를 보더니 “서장님에게 이런 일을 가지고 오면 어떻게 합니까?”하며 역정부터 냈다.
차일혁은 그런 경무계장에게 “상관 앞에서 소리 지르는 법을 어디서 배웠어?”하고 나무라며 외상에 대해 자세히 묻자, 경무계장은 “한정된 예산으로 외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죄송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저 사람이 얼마나 딱했으면 나를 직접 찾아왔겠소? 외상의 반만이라도 우선 갚아 주시오.” 차일혁은 경찰서의 어려운 재정보다 민생을 우선시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후에도 차일혁은 민생문제 처리에 누구보다 앞장서는 민주경찰, 민생경찰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전쟁초기 무주는 이곳으로 진출했던 미 1기병사단이 북한군에게 퇴로를 차단당하자 미군을 구출하기 위해 실시한 미 공군의 폭격으로 무주읍내의 건물 80%가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1950년 7월 상황이었다. 그로인해 무주는 1천2백 가구 중 약 1천 가구가 파손되어, 차일혁이 경찰서장으로 부임한 이후 엄동설한에도 주민들은 움막생활을 하고 있었다. 전쟁 중이라 자재를 구하기 힘들어 움막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때 차일혁은 기지를 발휘했다. 전쟁 중이라 일반 건축자재는 구하기 힘들었지만, 군수품으로 보급되는 건축자재는 요청만 하면 쉽게 조달됐다. 때는 마침 공비들의 기습에 대비한 참호공사가 각 지방마다 벌어지고 있었다. 차일혁은 강력한 적이 은거하는 설천에 참호 30개, 무풍에 참호 20개가 필요하다며 많은 양의 물자를 ‘백야전전투사령부(白野戰戰鬪司令部, 사령관 백선엽 육군소장)’를 통해 유엔군에 요청하였다. 자재는 신속하게 보급됐다. 차일혁이 공급한 건축자재로 주민들은 집을 보수할 수 있었다. 차일혁은 참호 없이도 공비들을 막아낼 자신이 있었다. 설령 일이 잘못되어 자신에게 징계가 떨어져도 감수하리라 생각했다. 추위에 떨고 있는 주민들에게 집을 만들어 주어 따뜻하게 잠이라도 자면 징계를 당해도 좋다고 여겼다.
차일혁이 명리(名利)를 마음속에 뒀다면 감히 그런 행동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차일혁의 심중에는 늘 국민들을 사랑하고 아끼는 민주경찰로서의 위민정신과 애민정신만이 존재했다. 그렇기에 그런 행동이 가능했다. 차일혁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을 오히려 좋아하며 즐겨했다. 차일혁은 경찰서장 시절 출근할 때마다 겨울을 보면서 뭔가를 중얼거렸는데 알고 보니, “나는 오늘도 자장면을 공짜로 얻어먹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차일혁에 대해서, 경찰관에 대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독백(獨白)의 울림’이 아닐 수 없다. 차일혁은 경찰에 투신한 이래 변함없이 민주경찰 또는 민생경찰이 되고자 다짐하고 노력했다. 전시나 평시 할 것 없이 늘 한 마음으로 국민들을 위하고 사랑했던 차일혁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위민(爲民)경찰이자 애민(愛民)경찰’의 표상이 아닐까 싶다. 대한민국 경찰은 그런 차일혁에 대해 무한한 자존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