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의 역사적 사건인 3·1사건의 희생자 유족들이 처음으로 말문을 연다.
제주4·3연구소는 오는 31일 오후 2시 제주도 문예회관 소극장에서 ‘70년만에 골암수다, 3·1의 기억 3·1의 현장’을 주제로 ‘열여섯 번째 제주4‧3 증언본풀이마당’을 연다.
올해는 제주4·3의 도화선이 된 1947년 3월 1일의 이른바 ‘3·1사건’이 일어난지 70년이 되는 해다.
이번 증언에 나서는 이들은 70년전 3·1사건의 현장을 온 몸으로 받아들인 목격자다. 3·1사건 희생자 유족 송영호(82·도남)씨, 돌담에서 숨죽이며 발포 사건을 목격한 양유길(82·이호)씨, 3·1사건에 참가했으며 4·3 때 무려 11명의 가족을 잃은 허영회(84·일도)씨 등 3명이 참석한다.
송영호씨는 1947년 3·1절 기념대회에서 희생된 송덕윤(이명 송덕수)씨의 아들로 아버지 송덕윤은 3·1절 제28주년 기념대회를 구경하러 갔다가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왔다. 당시 12살이던 그는 남초등학교 4학년생이었는데, 3·1절 기념식에 참석했다. 참가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태극기를 들고 있었다. 학생 대열에서 신나게 시가행진을 하던 중 발포소리를 들었다. “송덕수 총 맞았다”는 말이 순식간에 퍼졌고, 그는 곧바로 달려갔다. 복부에 총상을 입은 부친은 살려달라고 호소했지만 제주도립의원에서 끝내 숨을 거뒀다. 부친의 시신은 도남 청년들에 의해 마을로 옮겨졌고, 마을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를 치렀다. 그러나 경찰의 사과는 전혀 없었다.
양유길씨는 북초등학교 5학년으로 전교생이 참가한 1947년 3·1절 기념식 현장에 있었다. 당시 어렸기 때문에 맨 끝에서 따라가던 중 총소리와 동시에 ‘뛰어!’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기를 업은 아주머니(박재옥 여인)가 총에 맞고 쓰러지는 장면은 그녀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4·3으로 두 오빠를 잃었다.
허영회씨는 화북초등학교 6학년 재학 중 3·1절 기념식을 보러 북초등학교에 다녀왔다. 당시 학교나 관덕정 마당까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그는 돌아다니며 구경을 하다 일제 경찰복장의 기마순경을 보았다. 나중에 그 기마순경 때문에 3·1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뒤 4·3사건의 와중에 부모님과 형제자매 등 모두 11명이 희생됐다.
3·1사건 당시 미군정 경찰의 발포로 6명이 숨지고 8명이 부상을 입었으나 미군정은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은 커녕 대대적으로 강경탄압으로 일관했다. 이에 제주도청과 미군정 경찰 등이 참여하는 3·10 민관 총파업으로 이어졌고, 제주도의 민심은 더욱 흉흉해지면서 4·3사건으로 되는 도화선이 됐다.
제주4‧3연구소는 “지난 2002년부터 해마다 4‧3행사 기간에 4‧3증언본풀이마당을 열어왔다”며 “이는 4‧3경험세대들의 체험담을 후세대들에게 알려주고, 체험자들에게는 당시의 경험을 이야기함으로써 수십년 동안 마음속에 응어리졌던 억눌림을 해원한다는 차원에서 시작됐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하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증언자들이 `제주4‧3증언본풀이마당‘에 설 수 있을지 모르겠다”면서 “제주4‧3연구소는 이들의 여건이 허락하는 한 증언본풀이마당을 계속가질 것”이라고 다짐했다.
한편 이날 행사에는 정세균 국회의장이 증언본풀이마당 행사장에 참석, 유족들을 위로하고 인사말을 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