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주진 기자 =“촛불은 힘이 세다”
‘바람 불면 꺼질 것’이라던 촛불은 오히려 갈수록 더 커지고 강해졌다. 2만명에서 시작했던 촛불은 1천만으로 늘어나 마침내 아름답고 장엄한 바다를 이뤘다.
시민들은 저마다 장착한 무기를 들고 자발적으로 광장으로 달려 나갔다. 무기는 다름 아닌 스마트폰과 노트북, 테블릿PC 등 디지털 스마트 기기다. 시민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집회현장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생중계하고, 정보와 콘텐츠를 실시간으로 공유하면서 자신들의 의견을 활발하게 개진했다.
‘좋아요’ ‘공유하기’로 시작한 소셜미디어 친구가 광장에서 “이게 나라냐, 박근혜 퇴진”을 외치는 오프라인 동지가 됐고, 전 국민 95%가 공감하는 ‘박근혜 퇴진’ 전선이 형성됐다.
시민들은 또 SNS를 통해 광장에서 비폭력평화시위를 하자고 외쳤고, 그 결과 세계사에 유례없는 비폭력평화혁명을 이뤄냈다. 이밖에 정치풍자를 담은 ‘짤’ 제작 및 배포, '집 앞에 박근혜 퇴진 현수막 걸기', ‘#그런데 최순실은’ 해시태그 달기 운동, 온라인 촛불켜기 운동 등 다양한 방식의 운동이 전개됐다.
박 대통령의 퇴진론을 두고 오락가락했던 정치권도 광장의 촛불민심과 SNS에서 나타난 민심을 무시할 수 없었고, 결국 민심을 뒤따라 박 대통령 국회 탄핵-특검 수사-헌재 탄핵 심판으로 이어지는 법적 절차를 밟을 수밖에 없었다.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촛불집회는) 시민사회의 다원성을 보여주고 있고 공정성이 보장되는 사회를 원하고 있다. 시민사회의 자신감도 표출됐다."고 밝혔다.
온라인 네트워크를 통한 광범한 동원구조는 기존 시민운동의 조직 동원 방식을 넘어 거대한 시민행동을 낳았고, 이는 200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기술경제와 공론장, 시민문화의 변화가 극적으로 반영된 결과라는 평가다.
이번 박 대통령 퇴진 촉구를 위한 촛불집회는 스마트폰과 소셜 미디어를 빼놓고는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디지털 저항운동의 대표적 사례로 꼽힐 것이다.
이번 촛불집회는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 시위, 2011년 1월과 2월 이집트와 튀니지의 시민혁명, 2011년 5월 스페인의 ‘M15’ 운동, 그리고 2011년 9월 미국의 월가점령 운동 등에서 나타난 온라인 운동보다 더 진화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파편화된 개개인들이 SNS를 통해 얼마나 결속되고 조직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이번 촛불집회에서 나타난 또 다른 특징은 개개인의 자발적 참여 외에도 온라인을 통해 형성된 다양한 성향을 가진 집단의 오프라인 모임이 촛불시위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개인화된 집합행동’, 즉 공식적 위계조직에 대한 소속감이 부재하고 독특한 자기 스타일과 자아실현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사립돌연사박물관(개복치 키우는 게임), 오버워치 심해유저 연합회와 같은 게임 관련 모임에서부터 얼룩말 연구회, 한국 고산지 발기부전 연구회, 대한민국 아재연합, 노처녀 연대, 전국 집순이 집돌이 연합 등 그동안 볼 수 없었던 다양한 깃발들이 이번 촛불집회에 등장했다.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촛불이라는 직접민주주의 형태로 표출되었음에도 촛불민심이 정치 세력화되는 것을 반대하고, 나를 대표하려는 조직을 거부하는 문화로 나타났다는 것은 한국사회에 개인주의 성향이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만큼 지역·연령·계층을 떠나 개개인의 다양한 이해관계와 요구가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는 방증이다.
실제 정치스타트업 ‘와글’에서는 촛불민심을 대변할 온라인국회 ‘시민의회’를 만들자는 제안을 했다가 누리꾼들의 반발로 철회했다.
이 때문에 다양성, 탈중심성, 정보성, 풀뿌리 민주주의와 같은 원리가 두드러지는 최근의 네트워크형 집합행동이 과연 얼마나 구조적이고 체계적인 사회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론도 만만치 않다. 최근 SNS를 통해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있는 가짜뉴스의 폐해도 부작용의 일환이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직접민주주의든, 디지털 매체를 통해 어떤 의사소통 수단을 발전시키든 간에 선출된 대표에게 통치를 위임하는 대의민주주의를 대체할 수 있는 다른 무언가가 나타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최 교수는 “민주주의라는 말이 주권자로서 시민의 정치 참여에 기초를 두지만 대표를 선출해 그들에게 통치를 위임하는 체제”라면서 “이 점에서 선거와 정당은 민주주의를 작동시키는 중심 기제”라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디지털 촛불’은 한층 더 진화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시끄럽다. 더 많은 민주주의, 더 성숙한 민주주의로 가기 위해선 시민들의 소통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이민화 창조경제연구회 이사장은 “이제는 국가 의사결정 구조, 즉 거버넌스를 4차 산업혁명에 최적화된 구조로 새롭게 바꾸어야 한다”면서 스마트 거버넌스를 제안했다.
이 이사장은 “보안이 강화된 스마트폰 기술에 기반한 스마트 거버넌스는 언제 어디서나 국민들의 다양한 의사가 무비용으로 실시간으로 국정에 반영될 수 있는 시스템을 의미한다”면서 “스마트 거버넌스는 정부와 국회의 대의 민주제의 단점을 극복하는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