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공훈장 6개(충무무공훈장 1·화랑무공훈장 5)를 포함하여 무공포장(방위포장) 1개, 종군기장 2개(6·25사변종군기장·유엔종군기장), 공비토벌기장 2개를 받았다. 그가 받은 훈장(勳章), 포장(褒章), 종군기장(從軍記章)을 합치면 모두 11개나 된다. 모두가 빨치산토벌과 관련된 것들이다. 이는 차일혁이 약 5년간에 걸쳐 부하들과 함께 생과 사를 넘나들며 이룬 빨치산토벌작전에 대한 ‘성적표’이다. 이것만 봐도 차일혁이 빨치산 토벌에 관한 한 ‘국내 최고의 베테랑 전투경찰’임을 알 수 있다. 차일혁이 오늘날 경찰의 ‘사표(師表)이자 상징’으로 존경받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경찰은 물론이고 군인들도 무공훈장 6개를 받는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6·25전쟁 초기 육해공군총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정일권(丁一權) 장군도 3개의 무공훈장(태극무공훈장 2·충무무공훈장 1)을 받았고, 대한민국 건군 이래 최초의 4성(四星) 장군이 된 백선엽(白善燁) 대장(大將)도 5개의 무공훈장(태극무공훈장 2·을지무공훈장 2·충무무공훈장 1)을 받았을 뿐이다. 후방에서 비정규전을 수행하는 경찰관이 그렇게 많은 훈장을 받는 경우는 매우 드문 사례에 해당된다.
그것도 군의 장성급(將星級) 고급지휘관도 아닌 대대 및 연대급 전투경찰 지휘관이 많은 무공훈장을 받기란 더욱 더 어려운 일이다. 이는 차일혁의 전공(戰功)이 크고 많았음을 의미한다. 무공훈장은 전쟁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유공자들에게 수여되기 때문에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전쟁영웅의 상징’이자 ‘호국의 표상’으로 여긴다. 그러기 때문에 무공훈장을 받은 사람들은 최고의 무인(武人)이자 진정한 애국자로 국민들로부터 무한한 존경과 신뢰를 받게 된다.
알렉산더의 빛나는 승리 뒤에는 항상 전공에 상응하는 푸짐한 포상이 뒤따랐다. 전쟁에서 거둔 전리품들을 골고루 나눠줬기 때문에 알렉산더를 쫓아 유럽과 아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알렉산더는 죽은 부하들의 유가족들에게도 관심과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알렉산더가 부하들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았던 가장 큰 이유이다.
19세기 이후 세계의 전쟁지도자들도 포상제도를 적절히 활용했다. 이는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주요한 동인(動因)으로 작동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군인들의 사기를 올려주는 최고의 제도이자 가치로 점차 자리를 잡아갔다. 군신(軍神)으로 알려진 나폴레옹(Napoleon)도 일찍부터 훈장제도를 정착시켜 전쟁에서 부하들의 사기를 올리는데 적극 활용했다.
오늘날 프랑스의 최고훈장인 레종도뇌르(Legion d'Honneur)도 나폴레옹이 전장에서 공적을 세운 군인들에게 수여할 목적으로 제정한 무공훈장이다. 독립전쟁 이후 수 없이 많은 전쟁을 치렀던 미국도 마찬가지이다. 미국도 훈장제도가 발달한 국가 중의 하나다. 미국 최고의 무공훈장인 명예훈장(Medal of Honour)도 전쟁에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며 발군의 전공을 거둔 군인들에게 수여된다. 그래서 명예훈장만큼은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직접 수여한다. 미국은 명예훈장 외에도 은성무공훈장과 동성무공훈장 등 전투에서 뛰어난 공적을 세운 군인들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무공훈장 제도는 어땠을까? 대한민국은 6·25전쟁 발발 이후에야 비로소 훈장제도를 도입해 운용했다. 6·25전쟁이 났을 때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미처 무공훈장 제도를 마련하지 못했다. 국가건설에 바쁜 신생 대한민국으로서는 아직 전쟁에 대비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수립된 지 불과 2년도 안된 상태에서 맞이한 6·25전쟁은 법적이나 제도 등 모든 면에서 부족하고 미흡했다. 정부에서는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전공을 세운 군인 및 경찰 그리고 유엔군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부랴부랴 무공훈장 제도를 마련하게 됐다.
그때가 바로 낙동강의 위기를 극복하고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하여 북진을 서두르고 있을 무렵이었다. 이때 후방에서는 군의 일부 부대와 경찰이 남한 내에서 북한이 점령한 지역을 차례로 수복해 가는 한편, 지리산 등 인근의 험준한 산악지형으로 들어가 준동하고 있는 빨치산 토벌을 준비할 때였다. 이처럼 정부에서는 전쟁이 한 참 진행된 뒤에야 훈장제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대한민국 정부는 1950년 10월 18일 대통령령(大統領令)으로「무공훈장령(武功勳章令)」을 공포하여 전공이 있는 군인과 경찰 그리고 유엔군에게 무공훈장을 수여하게 됐다. 이때 공포된 무공훈장은 1등무공훈장, 2등무공훈장, 3등무공훈장, 4등무공훈장의 4등급으로 나뉘어졌다. 그러다 약 1년 뒤인 1951년 8월 10일 태극(太極)무공훈장, 을지(乙支)무공훈장, 충무(忠武)무공훈장, 화랑(花郞)무공훈장으로 명칭을 개정하게 됐다. 즉, 1등무공훈장이 태극무공훈장으로, 2등무공훈장이 을지무공훈장으로, 3등무공훈장이 충무무공훈장으로, 4등무공훈장이 화랑무공훈장으로 바뀌었다. 오늘날 5등급인 인헌(仁憲)무공훈장은 5·16후인 1963년 12월 14일 법률 제15호로 공포된「상훈법(賞勳法)」에 따라 제정되어 오늘에 이르게 됐다. 정부에서는 무공훈장 외에도 6·25사변 종군기장과 공비토벌기장 등을 대통령령으로 제정하여 6·25참전 및 빨치산토벌 군인과 경찰관들에게 수여했다. 차일혁이 이들 기장들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정부는 무공훈장령이 공포되기도 전에 훈장을 수여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처하게 됐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고 빼앗긴 서울을 탈환해 준 유엔군사령관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에게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들의 정성이 담긴 ‘선물’이 필요했다. 맥아더의 전공과 고마움에 대한 답례의 표시였다.
거기에는 무공훈장만한 것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것도 최고의 무공훈장이어야 했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1950년 9월 29일 서울 환도식이 거행된 그 날, 중앙청에서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원수(元帥)에게 대한민국 최초의 1등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그때는 미처 훈장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단 훈장증(勳章證)만 수여했다가 나중에 태극무공훈장을 제작하여 일본 도쿄의 맥아더 장군에게 보내줬다. 맥아더가 대한민국 태극무공훈장 제1호를 받게 된 배경과 까닭이다. 약 70년 전 신생국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무공훈장에 대한 심사와 절차는 엄격했다. 무공훈장 심사를 위해 정부에서는 국방부에 중앙공적심사위원회(中央功績審査委員會)와 예비공적심사위원회(豫備功績審査委員會)를 설치하여 운영했다. 심사절차는 무공훈장 훈격(勳格)에 따라 달랐다. 최고 등급인 태극무공훈장 추천은 국방부 중앙공적심사위원회의 심사서(審査書)를 첨부하여 국방부장관의 결재를 받은 후 국무총리를 거쳐 대통령에게 상신했고, 그 다음 등급인 을지무공훈장 추천은 각 군(軍) 공적심사위원회나 국방부 중앙공적심사위원회의 심사서를 첨부하여 국방부장관에게 상신했다.
그 다음 등급인 충무무공훈장과 화랑무공훈장은 예비공적심사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국방부장관에게 상신했다. 이렇게 올라온 무공훈장 수훈자에 대해서는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최종 확정됐다. 무공훈장을 심사하는 중앙공적심사위원회는 국방부차관을 위원장으로, 국방부 제1국장을 부위원장으로, 국방부 각 국장, 국방부 총무과장, 국방부 제1국 상전과장(賞典課長)을 위원으로 구성됐다. 예비공적심사위원회는 국방부 제1부국장을 위원장으로, 국방부 제1국 상전과장을 부위원장으로, 국방부 각국의 행정과장, 본부사령실 행정과장, 제1국 상전과(賞典課) 상전계장을 위원으로 구성됐다. 이렇듯 무공훈장의 심사는 국방부가 주관했다. 그러다보니 내무부, 그것도 중앙부처의 1개 국(局)에 해당되는 치안국(治安局)에 속한 경찰은 무공훈장을 받는데 있어 군인에 비해 다소 불리한 점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6·25전쟁 때 경찰은 군인에 비해 무공훈장 숫자나 훈격 면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6·25전쟁수행의 주체는 국군이고 군인이었다. 하지만 경찰도 후방지역에서 빨치산토벌을 수행하면서 많은 희생자를 냈고, 많은 전과도 올렸다. 무공훈장은 국가를 위해 혁혁한 전공을 세운 무인(武人)들에게 주는 것이 상례(常例)이다. 6·25전쟁 때 대한민국 정부는 국군과 경찰, 유엔군 그리고 심지어 일반인에게까지 무공훈장을 수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받은 무공훈장은 그들의 전공에 비해 약소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952년 12월 말, 국방부에서 집계한 무공훈장 수여 현황을 보면, 6·25전쟁 발발 이래 육군 54,266명, 해군 7,101명, 공군 1,360명, 유엔군 1,149명, 경찰 600명, 일반인 485명 등 총 64,960명이 무공훈장을 받았다. 이 기간 경찰은 전체 무공훈장 분포 면에서 1%도 안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외국군(外國軍)인 유엔군이 받은 무공훈장의 절반밖에 안 된다는 점도 알 수 있다. 1952년 12월 말 현재, 경찰은 전사 2,922명, 납치 396명, 실종 7,055명 등 총 10,373명의 피해를 입었다. 경찰이 받은 무공훈장 수훈자가 경찰 피해의 6%, 그리고 경찰 6만 병력의 1% 수준밖에 안 된다는 점이 새삼 눈길을 끈다.
희생과 병력 수에 비해 초라한 숫자다. 거기에 비해 전후(戰後) 해군과 공군을 제외한 육군이 받은 무공훈장은 149,058개에 이른다. 전쟁기간 육군 전사자는 135,858명이다. 육군전사자에 비해 무공수훈자가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경찰은 수훈자 숫자는 물론이고, 훈격에서도 군인에 비해 낮은 등급을 받았다. 충무무공훈장 이상 받은 경찰은 거의 없을 정도다. 대부분이 화랑무공훈장이다. 나라를 위해 싸우는 데 전후방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 넘쳐도 안 되지만 너무 적어도 안 되는 것이 포상이다. 1968년 1·21사태 때 종로경찰서장과 제1사단 연대장이 공비들에 의해 전사했다. 정부에서는 똑같이 1계급 특진과 함께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포상은 공평함이 생명이다.
칠보발전소를 탈환하고 남부군사령관 이현상을 사살한 차일혁도 예외는 아니었다. 경찰 중에서 가장 많은 무공훈장을 받은 차일혁도 겨우 충무무공훈장 1개를 받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차일혁이 받은 무공훈장은 빛날 수밖에 없었다. 전투에서 전공을 세우는 것도 어려웠지만, 무공훈장 심사는 차일혁에게 더욱 어려운 관문이었을 것이다. 뒤늦게 입문한 ‘독립군 출신의 전투경찰’이라는 ‘불리한 악조건’과 군인들 틈 속에서 경감 및 총경 계급장을 달고 군의 작전통제 하에서 빨치산 토벌을 해야만 했던 차일혁으로서는 뛰어난 전공이 아니고서는 무공훈장을 받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차일혁이 받은 6개의 무공훈장의 가치는 그 무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더욱이 경찰신분으로 국방부가 주체가 된 공적심사를 통과하여 무공훈장을 받기는 더욱 더 어려웠을 것이다. 전공에 비해 훈격도 떨어졌다. 뛰어난 전공이 있는데도 그랬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차일혁은 군인 못지않은 발군의 전공으로 전쟁영웅의 반열에 올라섰다. 그 이면에는 뛰어난 전공과 그에 따른 무공훈장이 뒷받침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로써 차일혁은 6·25전쟁 때 군에 비해 존재감이 미약했던 경찰의 자존감을 드높였을 뿐만 아니라 ‘호국경찰로서의 위상’도 제고하게 됐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