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1129일간 지속된 6䞕전쟁은 물론이고 전쟁이 끝난 후까지도 빨치산 토벌대장으로서 다양한 직책을 수행하며 발군(拔群)의 전공을 세웠다. 전투경찰 지휘관으로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가장 오랫동안, 그리고 가장 많은 작전에 참여하며 빨치산 토벌대장으로 활약했다. 1950년 12월 중순부터 시작된 제18전투경찰 대대장 때는 구이작전, 칠보발전소 탈환작전, 화엄사 등 천년사찰 보호, 명덕리작전을 수행했고, 연대장급의 철주부대장 시절에는 가마골작전, 무주작전, 구천동의 삼공리전투를 치렀다.
무주경찰서장 재직시에는 백야전투사령부(白野戰戰鬪司令部)의 주도로 이뤄진 지리산의 빨치산 토벌작전에 참가했고, 임실경찰서장 때에는 외팔이부대장 이상윤을 사살했다. 1953년 서남지구전투경찰대 제2연대장 시절에는 남한 내 빨치산총책인 ‘남부군사령관’이현상을 사살함으로써 후방지역을 안정시키고 지리산에 평화를 가져오게 했다. 그 과정에서 차일혁은 빨치산 사살 1,317명, 생포 375명, 박격포 등 무기류 369점 노획, 실탄 3,249발 노획, 쌀 1,071가마 회수, 농우(農牛)·양·말 46마리 회수, 경찰관 및 가족 53명 구출, 양민 708명 구출, 빨치산 아지트 1,973개를 파괴하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다. 전투경찰 중에서 단일 지휘관이 세운 전공으로는 단연 으뜸이었다. 차일혁이 전쟁영웅 또는 호국영웅으로 추앙받는 것은 모두 다 그 때문이었다. 차일혁의 전공기록은 국방부, 내무부 및 치안국, 전북일보, 월간조선사, 한국참전단체총연합회, 대한민국참전경찰유공자회 등의 자료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차일혁이 지휘하는 제18전투경찰대대의 첫 번째 작전은 완주군 구이면에서 활동하고 있는 빨치산 토벌이었다. 구이면 작전은 불과 1주일의 훈련을 받은 차일혁 대대가 1950년 12월 26일부터 28일까지 수행한 전투이다. 12월 27일 작전에서 차일혁은 장비가 빈약하고 훈련도 부족한 대원들을 지휘하여 우수한 장비와 전투경험이 많은 빨치산을 토벌해야 했다. 여간 부담스러운 전투가 아닐 수 없었다. 차일혁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소대장급 이상의 우수한 대원으로 척후정찰대를 조직하여 빨치산의 동태를 면밀히 살폈다. 첫날 전투에서 차일혁 대대는 여자 빨치산 4명과 남자 3명을 생포했으나, 둘째 날 전투에서는 빨치산의 매복공격을 받고 3시간에 걸친 치열한 백병전까지 펼쳤다. 전투는 차일혁의 목숨을 건 진두지휘로 겨우 격퇴하게 됐다. 전투결과 사살 42명, 생포 3명, 다발총 1정, 소식장총 2정, 수류탄 4발 등의 전과를 올린 반면, 전사 3명, 중상 5명의 피해를 입었다.
차일혁이 수행한 두 번째 작전은 1951년 1월 13일부터 3월 2일까지 수행한 칠보작전이었다. 칠보발전소는 충남과 호남지역에 전기를 공급하는 국가1급 시설이었다. 회문산에 본부를 둔 전북도당위원장은 칠보발전소를 탈취하기 위해 2천 여명의 빨치산을 동원하여 포위했다. 칠보발전소에는 제18전투경찰대대 2개 중대와 칠보지소 병력 45명이 경비하고 있었다. 빨치산들은 칠보발전소를 2중ܩ중으로 에워싸고 공격했다. 칠보발전소가 빨치산들에게 곧 넘어갈 위기상황이었다. 차일혁은 급히 75명의 대원을 소집하여 칠보발전소로 출동했다. 그렇지만 빨치산의 숫자가 워낙 많았다. 차일혁은 기지를 발휘했다. 차량을 반복적으로 운행하여 마치 대병력이 칠보발전소로 지원한 것처럼 가장했다. 빨치산들은 많은 경찰이 지원한 것으로 알고 움츠려들었다.
차일혁이 수행한 세 번째 작전은 1951년 3월 10일부터 3월 13일까지 수행한 고창작전이다. 이는 경찰 최초의 단독작전이었다. 당시 고창은 도내에서 치안이 가장 위태로운 지역이었다. 차일혁 부대는 칠보작전의 피로도 못 풀고 고창지역으로 출동했다. 고창의 빨치산들은 500명에 달했다. 전북도당 정치부장이며 노동당중앙위원인 김명환이 왜가리부대, 기포병단, 번개병단으로 구성된 빨치산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들은 서해 바다를 통해 북한과의 연락이 용이하고 험준한 산들을 끼고 있는 연화봉에 포진하고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곳은 빨치산 활동에 유리했다. 북한에서도 이곳 빨치산들에게 서해안으로 연결된 연화봉과 가마골을 반드시 고수하라고 지령할 정도였다. 이때도 차일혁은 특유의 기지를 발휘했다.
장연강이 있는 곳을 빼고 육지로 연결된 3면에서 빨치산들을 포위 공격했다. 결과는 차일혁 부대의 승리였다. 전과는 사살 165명, 생포 52명, 총기 51정, 벼 700가마를 노획했다. 벼 700가마는 주민들에게 고스란히 돌려줬다. 차일혁 대대를 작전 통제하던 제11사단장 최덕신(崔德新, 육군중장 예편, 군단장 역임) 장군은 “경찰사상 보기 드문 대전과를 거두었다”며 전공을 높이 평가하고 표창했다.
차일혁이 수행한 네 번째 작전은 1951년 4월 20일부터 4월 22일과 6월 10일부터 17일까지 수행한 정읍작전이었다. 이때 전북지역에는 최영희(崔榮喜, 육군중장 예편, 육군참모총장·합참의장·국방부장관 역임) 장군이 지휘하는 제8사단이 제11사단과 교대해 들어왔다. 차일혁 대대는 도내에서 농토가 기름지고 산림이 울창해 물자가 풍부한 곳으로 널리 알려진 정읍지역의 빨치산 토벌 임무를 받고 출동했다. 이곳 빨치산들은 1,500명에 달했다. 백암부대 300명, 전북도당 야산대 300명, 정읍군당과 각 면당부대 300명, 기포병단 300명, 기타 300명으로 구성됐다. 빨치산들은 주로 내장산과 백암산 등 산악지형에 은거하면서 활동했다. 차일혁 대대는 전투를 통해 이들 빨치산들을 격퇴해 나갔다. 전투결과 사살 190명, 생포 62명, 총기 128정, 실탄 1,444발, 백미 216가마, 일본도 2점, 아지트 570개를 파괴했다.
차일혁이 수행한 다섯 번째 작전은 1951년 7월에 수행한 명덕리 전투였다. 명덕리 전투는 남부군사령관이던 이현상 부대와의 전투였다. 이현상 부대가 장수군 명덕리 출장소를 기습 점령함에 따라 이곳을 탈환하기 위해 차일혁의 제18전투경찰대대가 출동했다. 이현상 부대를 맞아 차일혁은 전의(戰意)를 굳혔다. “여기서 싸우다 죽어도 좋다”는 결의였다. 부대를 진두지휘하며 빨치산들이 포진하고 있는 고지를 점령했다. 이현상 부대와의 첫 전투에서 승리했다. 지휘관으로서 쾌감을 느꼈다. 더불어 육십령(六十嶺) 아래에 있던 명덕리를 탈환하여 치안을 회복하게 됐다. 이로 인해 무주, 장수, 거창 방면의 교통로가 다시 열리게 됐다. 전투결과 사살 69명, 경기관총 1정, 60밀리 박격포 1문, 따발총 2정, M1소총 1정, 아지트 파괴 247개소, 농우(農牛) 38두, 의류 70점, 불온문서 17건을 노획했고, 빨치산들에게 잡혀 간 경찰관 25명과 양민 500명도 구출했다. 대단한 전과가 아닐 수 없다.
명덕리 전투를 전후하여 전북도경(道警) 및 차일혁의 신상에 변동이 있었다. 명덕리 전투 때 김의택 도경국장이 떠나고 윤명운(尹明運) 경무관이 새로 도경국장으로 부임해 왔다. 윤명운 국장은 이현상 부대의 도내 출현으로 다소 긴장했으나, 명덕리 탈환으로 다소 한숨을 놓게 됐다. 윤명운 국장은 빨치산의 준동이 가장 심한 전라북도의 치안확보를 위해 연대급 규모의 전투경찰부대를 새로 창설하는 조치를 취했다. 전북도경은 기존의 제17전투경찰대대와 제18전투경찰대대에다 새로 제36전투경찰대대를 창설하여 3개 대대로 구성되는 연대급 규모의 전투경찰부대인 ‘철주부대(鐵舟部隊)’를 창설했다. 부대장에는 빨치산 토벌에 혁혁한 전공을 쌓아 올린 차일혁 경감을 임명했다. 부대명칭인 ‘철주’는 윤명운 국장의 호(號)였다. 철주부대는 도(道) 단위 유일한 연대급 규모의 전투경찰 부대였다. 전라북도의 빨치산들이 그만큼 극성을 부리고 있다는 증좌(證左)였다.
차일혁이 연대급 규모의 철주부대장으로서 수행한 첫 번째 임무가 가마골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1951년 8월 14일부터 8월 25일까지 실시됐다. 가마골은 순창군 쌍치면에 위치한 곳으로 빨치산이 자랑하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이곳 빨치산들은 “모스크바가 함락될지언정 가마골은 절대로 함락되지 않는다”며 호언장담했다. 그 정도로 이곳은 산세가 험했다. 거기에다 완전무장한 빨치산 450명이 포진하고 있어 전투력도 만만치 않았다. 빨치산들은 이철준이 지휘하는 기포병단, 카추샤병단, 번개병단, 정읍군당 유격대, 순창군당 유격대로 이뤄졌다. 차일혁도 가마골 작전만은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마골 외곽의 고지를 포위하면서 하나씩 점령해 나가는 작전을 구사했다. 그 과정에서 항공지원도 요청했다.
그렇게 해서 가마골의 빨치산들을 토벌할 수 있었다. 전투결과 사살 135명, 생포 95명, 총기 78정을 획득했고, 전사 7명, 부상 8명의 피해를 입었다. 성공적인 작전에 차일혁의 상관들은 서로 자신의 부대로 끌어오려고 했다. 지리산지구전투경찰사령관 신상묵(辛相黙) 경무관은 “자신과 함께 지리산 토벌을 함께 하지 않겠느냐”며 권유했고, 작전을 통제하고 있던 제8사단장 최영희 장군도 “사단직속의 특별부대로 들어와 함께 싸우면 어떻겠느냐”며 정중히 제의했다. 차일혁은 이들의 제의를 모두 뿌리쳤다. 거절 이유는 단순 명쾌했다. 생사고락을 같이 한 부하들과 헤어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차일혁 다운 처사였다.
철주부대장을 마친 후 차일혁은 무주경찰서장과 임실경찰서장으로 부임해서도 관내 빨치산을 토벌에 매진했다. 무주경찰서장 시절에는 백선엽(白善燁) 장군이 지휘하는 ‘백야전전투사령부’가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나서고 있을 때였다. 차일혁이 지휘하는 무주경찰서도 참가했다. 빨치산과의 끈질긴 연(緣)이 차일혁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임실경찰서장 시절에도 여전히 빨치산 토벌에서 한가롭지 못했다. 차일혁은 남원과 회문산(回文山)에서 주민들을 괴롭혀 온 팔로군 출신의 북한군 대위 출신인 외팔이 이상윤을 드디어 사살했다. 차일혁이 가는 곳마다 빨치산들의 뿌리가 뽑혀 나갔다. 빨치산에 대한 발본색원(拔本塞源)이 아닐 수 없다.
차일혁은 1953년 5월 15일 총경(總警)으로 승진했다. 그 동안의 전공이 빚어낸 결과였다. 전공에 비해 늦은 진급이었다. 차일혁은 총경 승진과 동시에 서남지구전투경찰대(西南地區戰鬪警察隊) 제2연대장에 임명됐다. 그리고 남한 내 빨치산의 총수격인 남부군사령관 이현상(李鉉相)과 ‘적장(敵將)’으로 만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어쩌면 숙명(宿命)이었다. 이현상이 죽어야 남한지역의 후방도, 그리고 지리산에도 평화를 기대할 수가 있었다. 차일혁은 수색대를 통해 이현상의 행방을 추적했다. 답은 쉽게 나왔다. 이현상의 호위병을 생포해 그의 위치를 알아냈다. 1953년 9월 18일 11시, 이현상은 지리산 빗점골에서 차일혁이 지휘하던 수색대의 매복에 걸려 사살됐다. 이후 지리산의 빨치산들은 하나둘씩 힘을 잃고 소멸해 갔다. 어느 순간 지리산의 빨치산들이 완전히 사라졌다. 대한민국의 후방이 안정되고 지리산에 평화가 찾아왔다. 이 모두가 5년여에 걸친 빨치산 토벌과 남한 내 ‘빨치산의 총책이자 남부군사령관’이현상을 사살한 차일혁의 공(功)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