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판도라’(감독 박정우·제작 (주)CAC엔터테인먼트 공동제작·(주)시네마파크·배급 NEW)는 역대 최대 규모의 강진에 이어 한반도를 위협하는 원전사고까지 예고 없이 찾아온 대한민국 초유의 재난 속에서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한 평범한 사람들의 사투를 그린 작품. 이번 작품에서 정진영은 원자력 발전소의 실질적 책임자 박평섭을 연기했다.
박정우 감독은 ‘판도라’의 시나리오를 가장 먼저 정진영에게 건넸다. 반(反) 원전 주의자인 그에게 ‘판도라’는 “당연히 해야 할 작품”이었다. 물론 작품에 관한 우려도 있었다. 제작 가능성에 관한 문제였다. 그래서 그는 책을 덮고 다짐했다. “만들어지기만 한다면 무조건 한다”고.
- 우리나라에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한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을 읽으면서 그 점에 후끈 달았다. 책도 아주 재밌게 쓰여 있어서 출연 결정은 금방 내렸다. 만들 수 있을까에 대한 우려는 있었지만 제 생각보다는 일찍 시작했다.
- ‘왕의 남자’는 꼬박 1년이 걸렸는데. 하하하. 어쩔 수 없다. 저는 약속은 꼭 지키는 편이다. 제작진이 열심히 준비해서 여러 난관을 뚫고 촬영을 시작하게 된 거니까. 그러다 보니 막상 촬영을 들어간 다음에는 걱정할 게 없었다.
평소 원전에 대해 관심이 많으신 거로 안다
- 저는 80년대에 대학을 다녔으니까. 원적은 진보적 의제 중 하나였다. 깊이 알지는 못했는데 아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핵물리학자가 꿈이라고 해서 어떤 건가 들여다본 적은 잇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원전 정책을 계속 밀고 나갔기 때문에, 저는 그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판도라’는 그런 부분을 담고 있지만 반원전 운동을 일으키려는 작품은 아니다. 실태에 대한 문제 제기 정도지.
확실히 우리가 알지 못하는 원전에 대한 세세한 부분들이 담겨 있더라
- (영화가) 원전에 대한 설명이 특히 많은데, 한편으로는 ‘감독님께서 이 영화를 서브 교과서 역할을 하게 하려고 한 게 아닐까?’ 싶더라. 우리나라 사람들은 원전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으니까. 바로 옆 나라에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터졌어도 ‘남의 나라지’하는 마음이 큰 것 같은데 ‘과연 그런가’라는 질문이다.
하지만 최근 지진을 겪으면서 사람들이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영화를 보면서 너무 멀게만 느끼지 않는 것 같은데
- 그렇다. 영화를 찍을 때만 하더라도 이 정도로 큰일이 날 거로 생각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야기를 이렇게 꾸린 거다. 거리를 두고 이야기해보자는 거였는데 현실로 다가오니까 당혹스럽다. 관객분들이 너무 불안해하지 않을까? 현실로 보이면 안 되는데. 너무 두려워 말고 원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는 거였는데 덜컥 현실이 돼버렸다. 청와대 모습도 그렇다. 가상으로 만들어놓은 건데 개봉 시점에서 이렇게 현실이 될 줄 몰랐지.
개봉 시점에 관한 고민도 있었을 것 같다. 확실히 지진을 겪고 난 시점에서 불안감을 가중할 수도 있으니까
- 후반 작업이 오래 걸려서 막 완성된 상태다. 모두 이런 일이 벌어질 거로 생각지 못했던 거다. 그러니까 배급사(NEW) 측에서도 지금 내놓은 거겠지. 영화의 입장에서 현재 시점의 개봉은 유리한 상황은 아니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다른 곳에 쏠리니까. 그래도 영화는 갈 길을 가야 했고 다행히 입소문을 통해 그 무게감을 전달한 것 같다. 성수기에는 좋은 영화들끼리 싸우니까 승패의 결정은 영화의 힘이라고 본다. 결국, 흥행은 관객들의 도움으로 하는 거다. 일주일이면 그 작품이 다 드러나니까.
그래서 결말이 희망적이기 때문에 관객들이 우울감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 같다
- 어떻게든 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살 수가 없으니까. 다른 일반 재난 영화와는 다른 점이 자꾸만 현실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딜레마 중 하나다. 희망적이라는 건 엔딩만이 아니라 피부로 와 닿는 문제가 원전 문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경험한 제 지인이 말하기를 사고 당시 모두가 서쪽으로 달리기만 했다고 하더라. 그때 느낀 공포가 엄청나다고 한다. 그 공포 때문에 사회적 합의가 이뤄진 셈이다. 우리 역시도 점검해야 할 시점인 거다. 이 영화가 그런 논의에 시작점이라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사실 문제 의식이 높은 작품 더 많다. 다만 이 작품은 대중적인 파장을 더 넓히고 싶은 거다.
가장 먼저 캐스팅이 되었는데, 정진영이 가진 정의로운 이미지에 대한 우선순위였을까?
- 박정우 감독에게 물어보지는 않았다. 저는 명확히, 뭘 해야 하는 건지 보이니까. 그것에 집중한 것 같다. 할 일이 선명하니까. 이렇게 먼저 캐스팅을 해놓고 시작하는 경우가 드물긴 하지만.
시사프로그램을 진행했던 경험 때문일까?
- 언제적 ‘그것이 알고 싶다’인가. 하하하. 끝난 지 10년이 넘었다. 요즘 친구들은 내가 그 프로그램을 진행한 건지도 모를 텐데. 사실 ‘그것이 알고 싶다’를 그만둔 것도, 이미지의 고정화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였다. 그래서 더 많은,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했다. 허당부터 양아치까지. 그만둔 지 오래돼서 이제는 ‘어떻게 보일까’에 대한 걱정은 안 한다.
줄곧 꾸준히 소신을 밝혀온 것이 영향을 미쳤을지도?
- 김제동 씨나 이승환 씨에 비하면 뭐…. 그분들은 정말 대단한 분들이다. 경의를 표한다. 의사 표현뿐 아니라 조직을 움직이게 하는 활동가 수준의 일을 하시지 않나. 저는 드문드문 이야기하지만 그들은 활동가 수준이다. 저는 그렇게 대단하게 한 일도 없었고…. 블랙리스트에도 포함이 안 됐다. 원론적으로 당연히 배우나 가수, 방송인도 한 사람인데 의견을 밝히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