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1956년 7월 말의 일이다. 고려대학교 재단에는 하나의 경사가 있었다. 신창재(愼昌滓)란 사람이 상당량의 고미술품(古美術品)을 기증해 온 것이다.
신창재는 자신의 소장품 가운데서 중요한 서화(書畵)를 덕수궁 미술관에서 전시중이었는데 신도성(愼道晟, 전 통일원장관)과 유진오(兪鎭午) 총장, 이용희(李用熙, 전 서울대 교수)가 이의 기증을 권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고려대학교에는 원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내외에 자랑할 수 있는 민속참고품실(民俗參考品室)이 있었다. 1934년에 고(故) 안함평(安咸平) 여사의 희사금을 기금으로 발족한 것으로서 도서관 석탑 상부(上部)에 두었으나 6·25로 소장품의 일부를 분실한 뒤 그 나머지를 수습하여 도서관에 보관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물론 그 가운데는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의 특별한 관심으로 수집된 물건이 태반이었다.
목당(牧堂) 이활(李活)은 재단에 나가면서 도서관의 수집품을 살펴본 일이 있었다. 그 가운데는 인촌과 같이 수집한 물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촌이 서화·골동을 사들일 때마다 입버릇처럼 하던 일대(一大) 대학박물관을 만들겠다는 말을 상기하고 박물관을 차릴 수는 없을까 생각해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소장품만을 가지고는 너무나 빈약했다. 조선시대의 백자(白磁)와 목기(木器) 등 미술품이 많았지만 대종은 역시 민속참고품(敏速參考品)이었다. 거기다가 신창재의 고미술픔을 합친다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어디다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일대 대학박물관을 이룰 수 있을 것이어서 목당의 가슴은 설레었다. 인촌은 영국에 머무를 때도 대학들이 하나의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음을 보고 부러워했으며 꼭 그것을 조국에서 실현코자 했던 것이다. 교섭을 진행시켜 신창재의 전 수집품(全 蒐集品)을 신축된 대학 강당에 전시해 놓고 전문가들의 감정을 거친 후 9월 중순에는 신창재와 기부계약서(寄附契約書)를 작성하기에 이르렀다.
신창재에게는 고려대학교 박물관 명예관장(名譽館長)의 칭호를 주고 그의 소지품에는 ‘신창재(新昌滓)·박재표(朴在杓) 기증품’임을 따로 표시하여 전시하기로 합의하였다.
실제로 신창재의 소지품이 인도된 것은 1958년 2월이며 이를 계기로 박물관을 설치하게 되었다. 초대 관장으로 문과대 교수 김연학(金延鶴)을 임명하고, 이들 서화·골동품 및 기존 소장품을 정리하여 여러 번 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동시에 새로 고고, 역사, 미술, 민족 등에 관한 자료를 널리 수집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의 서화 수집(書畵 蒐集)으로서는 국내 최대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한편 재단에서는 이 귀중품을 진열하여 한국 문화 연구에 공헌하고자 도서관 뒤에 박물관을 신축하였다. 철근 콘크리트 3층(연평 851평)의 이 건물은 1961년 착공하여 1962년 준공을 보았다.
현재 박물관의 소장품은 총 2만4700여 점으로 그 소장품의 양과 질에 있어서나 건물의 규모에 있어서 국내 대학박물관 가운데 으뜸이며 박물관 신축 후 민충정공(閔忠正公, 민영환(조선 고종 때의 문신(1861~1905)을 높여 이르는 말)의 혈죽(血竹)과 유서(遺書), 그밖의 유품(遺品)까지 기증받아 더욱 진열실은 빛나고 있다.
목당이 재단 주무이사로 있으면서 가장 보람 있던 일의 하나가 이 박물관의 신설이었다.
일제하의 울적함을 달래기 위해 고미술품(古美術品) 수집으로 낙을 삼았던 목당은 취미를 위해 수집한 것이었지만, 목당은 큰 대학박물관의 설치를 꿈꾸면서 무리해서까지 수집에 집념을 보였던 것이다. 당시의 고미술품 수집을 위한 동호인들은 창랑(滄浪) 장택상(張澤相)과 동산(東山) 윤치영(尹致暎), 동은(東隱) 김용완(金容完) 들러서 이들은 때로 일인들이 귀국하면서 수집품을 일괄하여 처분하는 경우를 만나면 대금을 모아 한몫 지불하고 나서 기호에 따라 선태가여 인수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목당이므로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유달리 애착을 느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