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병란(兵亂) 등의 쿠데타가 일어나면 어떻게 했을까? 지금의 수도방위사령부 같은 군대가 있어서 왕성만 방어하면 되었을까? 만약 함경도에서 병란이 있어나면 그들이 한양에 이르는 길에 있는 모든 지방 군대들이 두 손 들고 바라보고만 있었을까?
조선시대 왕들은 이런 역모나 병란 등에 대비해 유사시 한 지방의 군사권을 위임받은 각각의 지방 관아의 수장이 때를 가리지 않고 급히 발병(發兵) 즉 군사 및 군대를 동원할 수 있도록 했다. 밀부는 그 때 군대를 동원할 때 쓰던 병부(兵符)를 말한다. 왕은 지방관아에 해당하는 유수(留守) ·관찰사(觀察使)·감사(監司)·총융사(摠戎使) ·수어사(守禦使) ·통제사(統制使) ·절도사(節度使) ·방어사(防禦使) 등에게 밀부를 주었다. 그 밀부는 제1부(符)부터 제45부까지 있다.
그런 밀부를 넣어두는 나무 상자를 밀갑(蜜匣)이라고 했다. 선조실록을 보면 선조 33년 8월 26일(병신)에 승지 최철견이 “모든 비밀에 관계된 문서는 으레 밀갑에 넣어서 입계하는 것”이라고 진언한 기사가 보인다. 밀갑에는 밀부만 보관한 것이 아니라 비밀 문서를 보관하는 상자를 통틀어 밀갑이라고 했나보다.
아무리 병란이 일어났다고 해서 지방 군대가 독자적으로 군사를 일으킬 수는 없었다. 밀부의 오른쪽은 임금이 보관하였다가 군사동원 즉 동병(動兵)의 필요가 있을 때에는 보관했던 쪽과 교서(敎書)를 내렸다. 파말마로 달려서 전달된 이 밀부와 교서를 받은 사람은 이것을 맞추어 먼저 진위를 확인한다. 이를 합부(合符)라고 하고 이렇게 확인된 뒤에서야 병사를 움직여 명령대로 거행하게 된다. 국왕이 밀부를 관원에게 내릴 때 함께 내리는 유서는 그 관원에게는 생명과 같이 귀중한 것으로서 유서통(諭書筒)에 넣어 항상 지니고 다녔다.
이런 밀부가 평창군 월정사에도 내려졌다. 2014년 3월 7일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158호로 지정된 평창월정사밀부(平昌月精寺密符)가 그것이다. 이 밀부는 조선 후기 1800년(정조 24)에 예조에서 월정사 주지에게 내린 것이다. 1800년 경신년 정월에 정조가 사도세자의 능, 현륭원(顯隆園)에 원행하실 때 인신(印信)을 새롭게 주조하여 달라는 상언(上言)이 있었는데 이를 임금이 예조에 내려 재가하였다. 국왕이 사찰에 내려 준 밀부로는 강원도뿐만아니라 전국에서 발견된 첫 사례이다.
오대산 월정사 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오대산사적(五臺山事蹟)의 `선원보략 봉안사적(璿源寶略 奉安事蹟)’편에는 “선조 39년 선원보략과 사고를 중대(中臺) 남쪽 호령봉 아래에 옮겨세우고 인신(印信)을 하사, 총섭을 설치하여 이를 수호토록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의 인신(印信)은 밀부가 맞지만, 정조대 이전에 만든 밀부로 문제가 생겨 정조대에 새로 만든 것이므로 현존하는 밀부는 아니다.
당시 오대산 중대 적멸보궁의 본사인 월정사에는 오대산사고를 지키는 승군 20여명이 있었다. 사고의 수직(守直)으로 조선 후기에는 외사고들이 산중에 설치되어 절이 승군들을 배치시키고 수호사찰의 주지(住持)를 예조에서 수호총섭(守護摠攝)으로 임명하여 수호 책임을 맡겼다. 절에 위전(位田)이라고 해서 토지까지 주어 수호하게 하였다.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은 1913년 일제강점기 데라우치 조선총독에 의해 불법적으로 당시 동경제국대학으로 반출, 이후 관동대지진 때 모두 소실된 것으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오대산 월정사를 비롯한 환수위 위원들이 조사에 나서 지진당시 대출되어 있던 46책이 동경대 도서관에 소장된 것이 확인됐다. 이후 전 국민적인 반환 운동을 벌여 2006년 일본 도쿄대로부터 반환받아 현재 서울대학교 도서관 규장각에 임시 소장되어 있다.
불법적으로 일제 총독에 의해 우리 오대산 실록은 강탈당했다. 하지만, 실록을 지키라고 왕으로부터 받은 밀명을 상징하는 밀부는 여전히 월정사에 남아있다. 그간에 서울대는 법인화되었으며, 평창군 오대산 월정사에는 ‘오대산기록유산전시관’이 국가지원을 받아 2017년 개관될 예정이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개최라는 국가적인 경사에 맞춰서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에 추가등재될 오대산본 조선왕조실록이 원래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은 민족의 정체성을 살리는 중요한 일이다.
보기에 따라서 일제가 강탈한 것을 우리 정부가 정부도 아닌 법인 서울대에 보관해 놓고 강원도 평창군 월정사로 돌려주지 않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는 대목이다. 일제강점기 때의 학교이름을 들어, ‘동경제대로부터 겨우 찾아왔더니 이젠 중간에서 경성제대가 안돌려주고 쥐고 있는 샘’이라는 강원도의 한 어르신의 빈정이 예사롭지 않다.
밀부를 내린 정조대왕을 비롯한 종묘에 모셔진 역대 왕들이 예조(지금의 문화관광체육부)를 통해 월정사 주지(현 주지 정념스님)에게 명한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 이 칼럼은 우리 모두가 맑고 밝은 길을 가기 위한 자성과 쇄신이라는 공익적 목적으로 일부의 의견과 우려 등을를 전하는 형식으로 작성됐다. 이는 일방의 의견일 뿐 다른 해석과 반론도 충분히 가능하다. 이 글은 rostraw.com에 게재된 것을 수정보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