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66주년 기획 下>전쟁서 피어난 인술

2016-06-23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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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년이 지나도 생생한 전쟁의 참상…6·25 참전용사 김성렬씨

“국가운명 풍전등화 시기라 다른 생각할 겨를 없어…많은 환자들 치료하며 눈물 흘러”

김성렬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서울시 부지부장[김세구 기자k39@aju]


아주경제 박준형 기자 = “총알이 배를 관통하고, 발목이 떨어져 나갔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는데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겨우 만 17세의 어린 나이에 최전방에서 전쟁을 겪었던 6·25참전용사 김성렬(84)씨는 당시의 참상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1950년 6월 25일. 벌써 66년이 지났지만 김씨의 기억은 마치 어제 일처럼 또렷했다. “26일이 월요일이라 학교에 갔는데 오후 2시쯤인가 문수산에 포탄이 떨어지더라고. 연락할 때까지 가있으라고 해서 집으로 갔어요.” 김포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소년에게는 낯설기만한 전쟁이었다.

한강다리가 끊어져 피난도 가지 못했던 김씨는 북한군에게 끌려가지 않기 위해 집 근처 야산과 밭에 있는 막사에 숨어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산 너머에 ‘구라망’으로 불리는 항공모함 함재기가 날아들어 폭탄을 쏟아 부었다. 눈앞에 보이던 동산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인천상륙작전이었다. “밤에 인천을 보니까 10분 정도 큰 불이 떠있는 거예요. 지금 보니까 그게 조명탄이었어요. 이튿날부터 인천에 약 3일 동안 폭탄이 쏟아진 것 같아요. 놀랄 정도로 아주 요란했어요.”

그날의 기억은 그를 전쟁터로 이끌었다. 서울 수복 이후 시청 앞 건물에서 입대 홍보 벽보를 보던 그에게 헌병이 다가왔고 군에 가고 싶었던 그는 곧바로 입영열차를 타게 됐다. 집에는 연락도 못 한 채였다. 부산에서 훈련을 받던 시절은 배고픔의 연속이었다. 그즈음 그는 전방에 가면 맛있는 것을 먹을 수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고 위생병 모집에 지원해서 교육을 받은 후 7사단에 배치됐다. 1951년 3월이었다. “전방에 가면 잘 먹는데요. 보급도 좋고 건빵도 나오고. 그래서 지원했어요. 7사단에 배치돼서 신고하는데 부사단장이 ‘너희들은 목숨이 초로와 같다. 목숨을 아끼면 안 된다’라고 하는데 섭섭하기도 하고 기가 막히기도 하더라고. 어렸지만 지금도 생생해요.”

배고픔에 선택한 전방은 한 마디로 아비규환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명씩 부상병들이 속출했고 그의 앞으로 환자들이 밀려들어왔다. “인사불성이 돼서 들어오는 중환자가 많아요. 우선 정맥주사부터 놔주는데 100㏄ 정도 맞으면 눈을 떠요. ‘여기가 어디냐’고 그러는데 막 눈물이 나는 거예요. 응급환자 치료해서 헬기에 태워 보내면 하늘을 쳐다보고 눈물을 막 흘렸어요.”
 

김성렬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서울시 부지부장[김세구 기자k39@aju]


전장에서 수많은 생명을 살린 그였지만 자신이 목숨을 잃을 뻔했던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하루는 전화기가 먹통이라 이상해서 나가보니까 머리에 뭘 묶고 피리를 불며 꽹과리와 북을 치는 사람들이 있는데 틀림없이 중공군이구나 싶더라고요. 혼자 있었는데 엉겁결에 방아쇠를 당겨 대여섯 발 쏘고 나니까 조용해지더라고. 죽으나 사나 싶어서 1500m 정도 되는 거리를 뛰어가니까 아군들이 있더라고요.”

또 한 번은 캄캄한 밤이었다. 출동명령이 떨어져 진지를 나섰지만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쾅쾅’거리는 적의 포탄 소리만 들렸다. 바위를 넘던 그는 결국 쓰러졌고 얼마 지나 깨어나 보니 머리와 이마, 귀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지금도 상처가 있는데 국가의 운명이 저놈들 때문에 풍전등화와 같은 시기라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었어요. 내 자신은 스스로 치료하고 환자들을 많이 치료했어요. 어찌나 많은 환자가 사망했는지 차가 몇 대가 와서 실어갔어요.”

이후에도 전쟁의 가혹함은 그의 앞에 수많은 환자들을 데려다 놨다. 최전방에서 나와 춘천 야전병원으로 옮긴 지 이틀째 되던 날, 엄청난 환자들이 몰렸고 그 중에는 전에 같은 부대에 있던 전우들도 포함돼있었다. “전에 같은 부대에 있던 전우들을 만났어요. 따발총을 맞았는지 다리부터 배까지 총알이 관통하고 발목이 떨어져 나가고. 저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데 어찌 된 거냐고 물으니까 ‘전투에 나갔다가 많이 갔다’고. 아마 저도 거기 계속 있었으면 화를 입었을 거예요.”

전쟁은 그에게서 전우들만 빼앗아간 것이 아니었다. 1952년 6월 입대 후 10개월 만에 처음으로 집에서 온 편지를 받은 그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비보를 들었다.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는 것. 그는 “한문으로 ‘어머니가 별세했다’고 쓰여 있는데 별세가 무슨 말인가 해석했더니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이었어요. 눈물이 막 쏟아지더라고”라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이어 “제가 막내라 무척 귀여워해주셨는데 보답을 못했어요. 6·25 사변 나던 해가 몹시 가물어서 곡식이 안 됐어요. 그래서 잘 드셔보지도 못했는데 제 소식도 못 듣고 돌아가셔서”라며 이내 참았던 눈물을 쏟았다.

전쟁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그는 1956년 제대했고 이후 긴 세월이 흘러 이제는 백발의 노인이 됐다. 나이가 들어 귀가 잘 들리지 않지만 그는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서울시지부 부지부장을 맡아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마지막으로 그는 6·25 66주년을 맞아 후손들을 위한 조언도 잊지 않았다. “초·중·고 수준에 맞는 6·25 관련 교육내용을 마련해서 한 달에 한 번이라도 교육을 시켰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자라나는 후손들이 호국정신을 잘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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