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1927년 5월 어느 날···.
비록 조국은 일본 제국주의의 발아래 짓밟혀 온 겨레가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어도 날씨만은 화창한 초여름의 날씨였다. 쾌적한 미풍은 막 싱그러워지기 시작하는 연초록의 나뭇잎들을 살랑이며 불고 있었다.
귀공자 모습에 나비넥타이, 스프링코트를 팔에 걸치고 서 있는 모습은 어딘가 세련된 신사의 기품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굳게 다문 입술은 결코 쉽게 동요되지 않을 묵직한 성품을 말해 주는 듯하고 빛나는 눈매는 먼 뒷날을 내다보는 동경 같은 것이 어려 있었다. 그는 두 달 전인 3월에 일본 와세다대학(早稲田大學) 정치경제과를 졸업하고 좀 더 멀리 좀 더 넓게 보기 위해 영국의 런던으로 먼 유학길에 오르고 있는 청년 목당(牧堂) 이활(李活) 바로 그였다.
이윽고 기차는 기적을 울리며 플랫폼으로 들어왔고 사람들은 부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멀고 먼 나라 영국으로 떠나는 목당은 배웅 나온 사람들에게 일일이 작별인사를 했다. 그 가운데 부인 이 씨도 있었지만 양친 앞이어선지 그는 다정한 작별의 위로 한마디도 주저한 채 간단한 목례로 모든 할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끝으로 그는 부친 석와(石窩) 이인석(李璘錫) 앞에 섰다.
“어서 기차에 오르거라. 다시 한 번 이르거니와, 너는 보아야 할 것이 너무 많고 배워야 할 것도 너무 많다. 세상은 하루가 멀게 급변하고 있지 않느냐? 또한 잘 알고 있겠지만 너의 뒤에는 가문이 있고, 네가 자란 마을이 있고, 너를 낳고 길러준 핏줄이 있다. 너는 그 모두를 대신해서 학문을 열심히 하고 세상을 널리 보고 돌아오도록 하여라. 큰 뜻을 가져라.”
당부하는 부친 석와의 말씨는 담담한 가운데도 단호함이 있는 그런 억양이었으나, 도쿄에서 귀국한 지 두 달이 채 못 된 맏아들을 다시 이름만 듣던 먼 나라로 떠나보내는 긴 이별 앞에 선 어버이로서의 불안과 쓸쓸함이 그 눈빛에는 어려 있었다.
“아버님 말씀 항상 깊이 명심하겠습니다. 좀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깨우쳐서 돌아오겠습니다. 그리고···.”
미처 말끝을 맺지도 못한 채 부자의 정을 눈빛으로 나누고는 뚜벅뚜벅 기차에 오르는 목당이었다.
이렇게 하여 청년 목당은 또다시 고국을 떠나 먼 영국 유학의 길을 떠났다. 당시 유럽으로 가는 길은 일본 고베(神戶)에서 배를 타고 남중국해와 인도양을 거쳐 수에즈 운하와 지중해를 지나 이탈리아 나폴리에 이르러 마침내 육지에 오른 다음 다시 도버 해협을 건너 영국에 이르는 약 40일의 해로(海路)가 있었지만 목당은 바다보다는 곳곳에서 좀 더 견문을 넓힐 수 있는 육로를 택하였다. 만주를 지나 시베리아 평원을 횡단, 폴란드 바르샤바와 독일 베를린, 벨기에 브뤼셀, 프랑스 파리를 거쳐 영국 런던에 이르는 길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때는 중국 대륙에서는 일본의 침략에 대항하여 장제스(蔣介石)와 마오쩌둥(毛澤東)의 이른바 국공합작(國共合作)이란 권력투쟁이 불을 뿜고 있었고, 소련에서는 1924년 블라디미르 레닌이 죽은 뒤로 이오시프 스탈린이 정권을 잡아 산업화정책(産業化政策)을 강력하게 밀고 나가던 시절이었다.
한편 영국에서는 1926년 대량실업으로 인한 총파업에 휩쓸리고 있었으며 같은 해 독일에서는 국제연맹(The League of nations,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20년에 설립된 국제평화기구로서 국제연합의 전신)을 조직 그 주축국이 되고 이탈리아에서는 파시스트당이 그 세력을 점차 확대해가고 있었다. 이처럼 아시아 대륙과 유럽 대륙이 다 같이 역사적 변혁의 소용돌이 속에 휘몰리고 있는 동안 미국에서는 1925년을 기점으로 행동주의가 고개를 들어 도약을 위한 기반을 다지고 있는 그런 격동의 시기가 아니던가.
이런 세기적 격동을 앓고 있는 세계를 가로질러 달리는 열차의 차창에 기대어 앉은 목당은 눈을 지그시 감고 갖가지 상념에 담겨 있었다. 영국 유학이라는, 웬만한 사람으로선 누구도 감히 생각조차 못할 행운을 안은 그는 수천만 명 가운데 하나 - 정말로 선택된 개인이 아닐 수 없었고, 그럼으로써 그에게 지워진 기대와 그가 해내야 할 책무(責務) 또한 그만큼 무거운 것이 아니겠는가.
들판에서 땀 흘려 일하고 있는 농부들의 모습이 보이는 저 차창 밖의 광경! 수 천 년 역사 속에서 오로지 농사짓는 일을 천직(天職)으로 알고 살아온 우리 백의민족(白衣民族)에게는 그 얼마나 잦은 외침(外侵)이 있었으며, 지금은 또 일제의 잔학한 식민정책에 짓밟혀 순진무구한 우리 백성들은 고통의 신음을 토하고 있지 않은가! 농부들의 저 깊이 파인 주름살 속에, 깊게 팬 밭이랑 사이에 서린 우리 민족의 한(恨)을 나는 얼마나 내 고통으로 느끼고 내 아픔으로 앓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런 생각과 함께 목당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두 뺨으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런 그였으므로 한만국경(韓滿國境)을 넘어 만주에 접어들었을 때는 비록 몸은 조국을 멀리 떠나 달리고 있지만 마음은 좀 더 가까이 조국으로 되돌아가고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기차는 끝없이 펼쳐진 광막하고 기름진 만주 벌판을 지나고 있었다. 거긴 바로 그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이 농사짓고 말 달려 사냥하던 생활 무대 - 그는 지금도 조상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기차는 다시 인종의 모습도, 펼쳐지는 자연의 풍경도 다른 러시아 땅에 들어서서 바이칼 호를 지나고 폴란드의 바르샤바와 정권이 어수선한 독일 베를린을 지나 벨기에 브뤼셀, 그리고 마침내 기차 여행의 마지막 종착역인 프랑스의 칼레 항(港)에 도착했을 때는 그가 서울을 떠난 지 근 20일이 지난 때였다. 그는 긴 여행으로 건장한 육제도, 단단히 무장된 정신도 완전히 곤핍해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 다시 도버 해협을 건너는 배를 탄 그는 마침내 영국의 해안이 보이기 시작하고, 이윽고는 백설 같은 흰빛의 절벽 화이트 클리프(White cliff)가 펼쳐지면서 그 위로 고성(古城)이 우뚝 솟아 있고 아래로는 옹기종기 작고 깨끗해 보이는 항구 도시가 나타나자 어느 시인도 찬탄해 마지않은 그 광경과 함께 드디어 목적지에 다다랐다는 안도감으로 가슴이 뛰는 흥분에 휩싸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