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우리나라에 외세가 휩쓸려 들어와 드디어 나라의 500년 사직이 무너지는 19세기 말의 저 불운한 시기에도 꾸준히 발전해 가는 하나의 가문이 있었다. 그리고 이 가문은 뒤에 나라가 독립이 되어 국권을 되찾을 때 큰일을 하게 되는 훌륭한 인물들을 또한 배출해 낸 집안이기도 하다.
기 집안, 즉 목당(牧堂) 이활(李活)의 집안을 그곳 사람들은 ‘영천(永川) 이부자(李富者)집’이라고 불렀다 ‘벼 만 석(萬 石)’, ‘현금 만 석(萬 石)’, 그리고 ‘아들 만 석(萬 石)’이라 하여 한수(漢水) 이남에서는 영천 이부자 만한 부와 귀를 누리는 집안도 드물다고 했는데, 여기서 ‘아들 만 석’이라 함은 말할 필요도 없이 목당 이활을 맏이로 한 홍(泓)과 담(潭), 호(澔) 네 형제를 가리킨 것이다.
물론 해방 후 토지개혁으로 이부자의 ‘벼 만 석’은 옛 말이 되었지만 ‘만 석의 아들’들 만은 더욱 뻗어나가 목당을 비롯한 네 형제뿐만이 아니고 그 후손들까지도 사회에 기여하는 역할이 뛰어나 명문가의 성명을 더욱 드날리게 되었던 것이다.
해방 직후 어느 날인가, 목당의 부친 석와(石窩) 이인석(李璘錫)은 장손 병린(秉麟)을 사랑으로 불러 큰 궤짝을 내놓고 열어보라고 하셨다.
손자 병린이 조심스레 그 궤짝을 열어 보자 그 안에서 아주 오래된 듯한 두루마리 첩지와 옛 관복이 나오지 않는가.
“할아버지, 이것들이 다 무엇인지요?”
“이 물건들은 너의 증조 할아버님이 중추원 의관이자 경상관찰부에 계실 때 쓰시던 옷가지와 서류들이니라. 우리 조상의 채취가 흠씬 묻어 있는 물건들이니 가보로 소중히 보관하면서 어르신네의 높은 뜻을 새기도록 하여라.”
뿐만 아니라 석와는 손자 병린을 시켜 그 밑에 있는 것들도 꺼내 보라고 지시하는 것이었다.
그 궤짝의 밑바닥에는 지폐로 가득 차 있었다. 전체 금액을 추측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돈이 첩첩이 쌓여 있지 않는가.
“이개 모두 돈이군요.”
병린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래, 모두 돈이다.”
석와는 담담하게 받으면서 거기 있는 지폐 가운데서 두 장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알다시피 이제 일본은행권은 쓸 수 없다고 하지 않더냐. 이 일본은행권은 휴지만도 못하게 되어버린 게야. 돈이라는 것은 사용하는 방법에 따라 훌륭한 업적을 남길 수도 있고 악한 짓도 할 수 있는 법이다.”
석와는 병린에게 궤짝의 지폐뭉치 가운데서 일본은행권과 조선은행권을 구분하여 일본은행권은 모두 은행에 예금토록 하라고 지시했다. 병린이 그날 그 지폐를 가려내는 작업을 끝낸 것은 무려 새벽 3시 쯤이었다. 모두 90여 만 원 가운데 일본권은 7만여 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조선은행권이었다.
당시 가치로 10만 원이면 천 석(千 石)이라고 했으니 이밖에 가지고 있던 많은 은행 예금까지 합치면 이 부자집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듯이 ‘현금 만 석’이라고 한 것은 조금도 과장된 표현이 아니었다.
이렇게 큰 부자집의 장남으로 태어난 목당 이활은 어려서부터 도쿄에 이어 런던으로 유학을 떠나 많은 공부를 하고 돌아와 그의 확고한 신념대로 오직 무역입국(貿易立國)에 한 평생을 바치어 한국무역협회(韓國貿易協會)를 창설하고 종신토록 그를 사심없이 이끌어 온 것인데 이는 이부지 한 가문의 영광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자랑이고 나라이 행운이었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큰 그릇이 되어 나라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목당이지만, 그의 경력이란 한국무역협회 상무이사로 출발하여 회장을 거쳐 명예회장으로 끝났다고 해도 크게 어긋난 말이 아닐 정도로, 만약 그의 약력을 써보기로 한다면 불과 몇 줄 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목당을 말하는 이 자리에서는 매우 독특한 특성을 지적해 두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목당은 한 때 정계에 발을 들여 놓기도 하였지만 그의 그런 행적은 처음부터 그의 진정한 소망이 아니었고, 다만 그는 한국무역협회의 발전에 기여하는 것으로 소명으로 알고 전력 봉사하다가 간 분인 것이다. 그만큼 생전의 목당의 듬직한 체구와 과묵한 인품에서 사람들은 한국무역협회를 떼어서 생각할 수 없었고, 오로지 한국무역협회를 위해 평생을 두고 헌신한 그에게서 사람들은 숙연함과 경건함까지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어렸을 때 집안 어른들은 장차 그가 목민관(牧民官)이 되기를 바랐다. 그리하야 아호까지도 목당(牧堂)이라고 지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영국에서 유학하는 동안 자원이 부족한 우리 조국이 장차 살아 나갈 길은 오직 무역(貿易)임을 깨닫게 되었고, 이런 그의 깨달음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소신을 마음껏 피력하다가 가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런 그의 거룩한 외길 인생을 기려 후세의 남은 사람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장례를 경제단체장(經濟團體葬)으로 받드는 일이었다.
목당의 경력은 크게 나누어 한국무역협회 회장으로서의 재계 활동과 고려대학교 재단인 고려중앙학원(高麗中央學院) 이사장으로서의 육영사업이 전부이며 그 가운데서도 한국무역협회에 바친 그의 족적은 단연 두드러진다. 만석꾼의 아들로 일찍이 남들은 꿈조차 꾸기 어려운 영국 유학의 길을 떠나 10여 년 동안 런던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돌아온 목당은, 영국에서 같이 지낸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 등 거인들과 친교를 가지며 때를 기다리다가, 조국 광복을 맞자 상산(常山) 김도연(金度演)과 손을 잡고 한국무역협회 창설(創設)에 나선 것이 그의 일생의 사업이 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일찍이 동양의 학문을 통하여 군자도를 익혔던 목당은 다시 영국의 서양 학문과 신사도를 익혀 선비의 생활에도 추호의 어긋남이 없는 삶을 살았다. 그가 항상 이해가 엇갈리는 재계의 경제단체장(經濟團體長)을 당연직인 양 20여 년간이나 맡게 된 것도 그의 이런 합리적인 사고방식과 사심없는 행동에서 가능했던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